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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Big Questions'] 현재 40개국 크기 로마, 40만 병력이 수천㎞ 국경 방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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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호 25면

‘로마의 함락’, 실베스트르(Joseph-Noel Sylvestre)의 1890년 작품.

하얀 대리석 건물로 가득 찬 고대도시. 영웅들의 거대한 동상 아래 토가(관복)를 두른 사람들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어느 날 지평선 넘어 갑자기 미개한 야만인들이 쳐들어오기 시작한다. 황금색 갑옷을 입은 군인들은 용맹하게 싸우지만 밀려오는 야만인들에게 도시는 결국 함락당한다. 여자들은 강간당하고 노인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린다. 하늘을 찌를 듯하던 기둥들은 무너지고 문명 그 자체가 사라진다. 인류가 사랑하고 고이 간직하던 모든 것들의 전멸이며 끝이었다.

<25> 서양인들의 영원한 제국

검은 피부의 ‘오크’(Oaks)들이 깊은 땅속에서 기어 나와 흰 피부의 ‘엘프’(Elves)들과 싸운다는 백인 우월주의적인 영화 『반지의 제왕』의 한 장면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서양인을 향수에 빠지게 한 로마제국의 멸망 시나리오다.

그렇기에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묻지 않았던가? 어떻게 전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가 멸망할 수 있었느냐고? 왜 제국의 중심이던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에서 소와 양이 풀을 뜯게 되었느냐고?

당시 인류 20%인 1억 명을 지배한 제국
우선 로마제국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로마는 천국도, 플라톤이 상상한 완벽한 도시도 아니었다. 거리는 좁고 혼란스러웠다. 티베르강을 낀 작은 마을이 기원후 2세기 당시 전체 인류의 20%였던 1억 명을 지배하고, 로마 시에만 한때 100만 명 넘게 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건물과 동상은 강한 단색들로 색칠돼 있었다. 독일의 낭만주의 학자이자 미술사가인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이 오랜 세월 탓에 색이 다 벗겨진 유적들만을 보고 ‘백색의 우아함’이라고 표현했던 것과는 달리 로마는 사실 디즈니랜드나 라스베이거스 같은 유치의 극치였을 것이다. 좋게 해석하면 무질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미국 뉴욕이나 인도 뭄바이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잠깐! 하지만 적어도 로마 병사들은 질서와 용맹의 상징 아니었는가? 깔끔한 갑옷에다 사각형 방패들로 사방을 보호한 ‘테스투도’(testudo, 거북이) 형태의 전술로 수적으로 월등한 적군을 물리치지 않았던가? 물론 초기엔 그랬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스쿠툼(scutum)이라 불리는 사각형 방패는 무거웠고 줄 무늬식 갑옷은 자주 망가져 유지하기 어려웠다. 대부분이 용병 기마대로 구성된 후기 로마 병사들은 거추장스럽다며 갑옷 입기를 거부했다. 기마병에 더 적합한 타원형 방패, 파르마(parma)를 선호했다.<오른쪽 아래사진> 후기 로마 병사는 이미 중세의 기사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후기 로마 황제들 평균 2년 미만 재위
후기 로마 장군들은 대부분 프랑크·고트·반달족 등 야만인 용병 출신들이었다. 그리고 변태적 퇴폐와 사치로 악명 높았던 초기 로마 황제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후기 황제들은 암살과 반란을 두려워하며 숨어살아야 했다. 기원후 235년 세베루스 황제가 암살당한 뒤 불과 50년 만에 26명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평균 재위 기간이 2년을 넘기지 못했다는 말이다. 칼리굴라 황제같이 자신이 사랑하던 경마를 집정관으로 임명할 여유도, 네로같이 로마 한복판을 헐어 거대한 호수와 별장을 지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아랍인 출신으로 첫 로마 황제 자리에 오른 필리푸스(Philippus Arab)란 인물이 있다. 반란으로 황제가 된 그 역시 반란과 암살로 생을 마친다.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 남아 있는 필리푸스의 흉상은 우리에게 애타게 말하는 듯하다. 끝없는 근심, 찬란한 과거에 그늘진 현재,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래의 두려움을 말이다.

도덕성만으로 로마 성공 비결 설명은 무리
그렇다면 로마는 정말 왜 멸망했을까? 크게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애국·검소·신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제국이 후손들의 사치·국제화·도덕적 상대주의 때문에 멸망했다.

초기 로마를 우상화하던 독일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센, 카이사르의 독재를 숭배한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정신, 대한민국의 새마을운동을 연상하게 하는 주장이다. 더 이상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며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기에 로마가 망했다는 이 18, 19세기식 이론은 물론 문제가 많다. 로마인들을 사치에 빠지게 한다며 그리스식 극장을 반대하던 카토, 검소한 생활로 유명했던 카타르고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로마에 있었다. 철저한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가졌던 이들은 모두 로마 공화정 시대의 인물이다.

하지만 제국으로 번성한 로마는 멋진 연설 하나에 감동해 불타는 애국심으로 가득 차 모두 마당을 쓸고 전쟁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그런 아늑한 작은 마을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막에서 스코틀랜드까지, 추운 독일에서 리비아 뙤약볕까지 이르렀던 방대한 로마는 이미 너무나 국제적이고 복잡하며 현대적인 사회였다. 오늘날 미국의 경제·외교·군사적 성공을 대부분 농촌 출신인 18세기 미국 헌법 제정자들의 단순함·근면함으로 설명하려는 ‘티 파티’(Tea Party) 운동이 억지스럽듯, 로마제국의 성공 비결을 초기 공화정 시대의 도덕성으로만 설명하는 건 무리다.

둘째, 선조들의 종교를 포기했기에 로마가 멸망했다는 견해도 있다.

모든 경쟁자를 물리친 뒤 기독교를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기원후 330년 로마를 등지고 신(新)로마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설립한다. 여전히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을 섬기던 대부분의 원로원 의원들은 수도 이전을 강력히 반대한다. 제국이 여기서 만들어졌으니 로마를 포기하는 순간 제국도 멸망할 거라고. 그러나 노인들의 사교 모임으로 퇴보한 원로원이 황제의 칼 앞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기원후 382년, 절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라티아누스 황제는 명령한다. 제국에서 “그리스와 로마 신들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라”고. 특히 원로원에 남아 있는 승리의 여신 동상을 당장 없애버리라고. 먼 훗날 『철학의 위안』이란 책으로 유명해지는 기독교의 성인 보에티우스(Boethius)의 증조할아버지였던 비(非)기독교 의원 시마쿠스(Quintus Aurelius Symmachus)는 황제에게 무릎 꿇고 부탁한다. 제발 승리의 여신만큼은 보존해 달라고. 여신 없이 로마는 멸망할 거라고.

전통 신들을 부활하려던 노력 때문에 기독교인들로부터 ‘배교자’(apostate)란 별명을 얻게 된 로마의 마지막 비(非)기독교 황제 율리아누스는 제국의 쇠망을 기독교인들의 영향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율리안』의 저자 미국의 고어 비달(Gore Vidal·1925∼2012)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지만 로마의 쇠망은 이미 기독교에 대한 억압이 극치에 달하던 2~3세기에 시작되지 않았던가? 이 역시 설득력이 그리 높지 않은 이론인 듯하다.

셋째, 로마 멸망의 직접적 원인은 군사적 퇴보에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초기 제국시대까지 로마군은 시민들로 구성된 보병 위주였다. 강한 기강, 지옥 같은 훈련,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로마 군단은 무적이었다. 하지만 용병과 기마병 위주로 군 구조가 바뀌면서 제국이 멸망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일까? 기원후 476년 서(西)로마가 멸망한 후 홀로 남게 된 동(東)로마제국에선 게르만족 출신 용병들을 퇴출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다시 제국 초기의 무기와 전략들을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부에서 제기됐다. 하지만 말에서 내려 다시 사각형 방패를 들고 줄무늬식 갑옷을 입는다고 상황이 달라졌을까? 물론 아니다. 생각해보자. 2세기 초 로마는 650만㎢의 영토를 갖고 있었다. 오늘날 40개가 넘는 국가로 나눠진 이 거대한 땅을 불과 40만 명의 병사로 지켜내야 했다. 이미 제국 예산의 80% 이상을 군 유지에 사용했기에 더 이상의 예산 증액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대부분의 병사가 수천㎞가 넘는 국경선을 따라 배치돼 있었기에 본질적인 문제가 생긴다. 만약 전방 한 곳이라도 뚫리면 제국 전체가 무방비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려 해도 걸어서는 몇 주씩 걸린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강한 색깔로 페인트돼 있던 로마시대 동상(왼쪽). 후기 로마 병사(오른쪽).

서양인 ‘1등 인종’ 믿음 뿌리는 로마
국경선은 지역 민병들에게 맡기고 정예 군단은 기동력이 뛰어난 기마병들로 업그레이드한 뒤 이동하기 편한 지역에 나눠 배치해야 한다. 말을 타는 순간 칼은 당연히 길어져야 하며 방패는 타원형이 더 적절하다. 매번 대장장이가 필요하던 ‘줄무늬식 갑옷’과는 달리 병사가 직접 수리할 수 있는 ‘비늘 갑옷’이 더 효율적이다. 기마부대로 탈바꿈하며 자연스럽게 커진 야만인 용병들의 영향력도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 혁신이 없었다면 거대한 로마제국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못했기에 제국의 기원 그 자체가 멸망 원인의 씨앗을 이미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랍인 출신이었던 후기 로마 황제 필리푸스(Philippus Arab, 기원 후 204∼249).

세상의 모든 것을 얻었던 자의 멸망.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의 실현. 피와 눈물을 통해 얻어낸 것은 언제든지 다시 무(無)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허무함. 이런 이유들 때문일까?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가 모든 서양 철학을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고 정의했듯, 서양의 역사는 로마제국을 부활하려는 노력의 반복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동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카롤루스의 제국, 신성로마제국, 러시아제국, 합스부르크제국, 대영제국. 다만 로마의 원로원은 국회로 변했고 집정관은 수상이 되었다. 대리석 기둥들로 둘러싸인 신전은 도서관·은행·재판소로 탈바꿈했다. 교황은 황제의 명칭 중 하나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를 물려받았다. 어쩌면 로마는 멸망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서양인들 가슴속에 로마는 언제나 존재했으며 ‘지구 1등 인종’이란 그들의 오만한 믿음 아래 로마제국은 오늘도 존재하고 있는지 모른다.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거쳤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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