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칼럼] 뒤숭숭한 시절, 차라리 원시가 그리울 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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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호 27면

미국 휴스턴 발레의 2013년작 ‘봄의 제전’의 한 장면. [사진 Amitava Sarkar]

춤을 추고 싶다. 미친 듯이. 엉덩이를 돌리면 젊은 것이고 어깨를 들썩이면 옛날 할아버지 풍이겠지. 머리채를 마구 흔들면 제정신이 아닌 건가. 춤을 추어 본 적 없는 내가 흔든다면 다리, 엉덩이, 어깨에 체머리가 온통 따로 노는 제대로 막춤이리라. 그렇게 미친 듯이 춤을 추다 학학 숨이 가빠 쓰러지는 기분은 어떨까. 이인성 소설에 그런 게 있다. ‘미쳐 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이라고. 존재에는 본질 따위라는 게 없다는 자아분열의 야릇한 ‘야그’인데 제목으로 이미 다 말했다. 미쳐 버리고 싶은데 미쳐지지 않아서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은 미친 세월이여.

[詩人의 음악 읽기]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과 ‘불새’

정통 춤곡이나 팝송을 틀어 놓으면 춤을 출 수 없다. 패턴과 규칙, 그리고 무엇보다 멋스러워야 한다는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재롱잔치도 아니고 춤으로 웬 멋이고 기술인가. 꼴리는 대로 흔드는 막춤이 제격인데 그 반주라면 단연 원시주의 계열 음악이다. 후기 낭만파류의 세련과 고상미가 꼴 보기 싫다고 19세기 말에 출현했다. 스트라빈스키가 워낙 우뚝한 존재라 원시주의 하면 그의 ‘봄의 제전’이며 ‘불새’ 등이 곧장 떠오른다. 초연 때 이게 무슨 음악이냐며 파리 시민들이 격분해 난동을 피웠다는 유명한 전설이 따르지만 지금 기준으로 들으면 그렇게 유난벌떡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두 곡 다 절반가량은 명상적 선율이 감싼다. 대지의 신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내용이 ‘봄의 제전’인데 어럽쇼, 뭘 어쨌는지 모르지만 제물 처녀는 황홀경에 빠져 죽는단다. ‘선택된 아가씨의 성스러운 춤’이 죽는 대목인데 작열하는 타악기, 관악기의 불규칙한 박동이 참 심란해서 통쾌감보다는 불안이 전편을 감싸고 돈다. 스트라빈스키도 미쳐 버리고 싶은데 미쳐지지 않는 경지를 일찍이 헤아렸으리라.

앙세르메 지휘의 ‘불새’ 음반.

러시아 민요에서 채취한 발레곡 ‘불새’는 나중에 작곡한 ‘봄의 제전’에 비해서는 훨씬 얌전하지만 둔중한 현악기 총주의 거친 울림이 상당한 격동을 불러일으킨다. 마법으로 사람들을 성 안에 가둔 녹색 손가락의 무서운 거인 카슈체이를 불새의 깃털을 이용해 잡아죽인다는 내용이다. 막춤의 용도로 이 곡을 듣는다면 제4절 ‘카슈체이 왕의 지옥의 춤’ 대목으로 곧장 들어간다. 원시의 음악과 언어에 대해 고고학자 스티븐 미슨이 정리한 것을 음악학자 김성은의 글에서 재인용하자면 총체적(holistic), 다중적(multi-modal), 조작적(manipulative), 음악적(musical), 모방적(mimetic)이란다.

한 세기 전 스트라빈스키가 추구한 원시에도 이들 정의가 대체로 들어맞는 듯한데 결정적으로 새로 추가된 한 가지가 있다. 영어로 표기하면 ‘nervous’쯤이 어떨까. 혹은 ‘uneasy, anxious’라든지. 이걸 우리말로 번역하면 ‘불안’이고 더욱 순우리말로 들어가면 ‘뒤숭숭함’이다. 스트라빈스키도, 그 시절의 친구 피카소도 한결같이 뒤숭숭한 영혼들이었다. 더욱 흥미롭게도 이 두 친구 모두 자신의 예술이 ‘추상’으로 분류되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했다는 점이다. 좀 내 멋대로 해석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느끼는 세기말, 초의 불안과 혼돈과 전율의 표현은 몽롱한 추상이 아니라 이마에 박힌 못처럼 아프고 확실한 ‘구체’라는 의미 아니었을까.

무시무시한 카슈체이 왕이나 제물로 죽임을 당하는 처녀의 상징을 통해 현재 우리가 겪는 막장 자본주의 시대상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화적 해석조차 왠지 한갓지고 사치스러운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아마도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느껴야 하는 통증이 추상이 아니라 뚜렷한 구체이기 때문이리라. 가난한 자는 영원히 가난할 것이고 부유한 자는 세습 귀족으로 등극하는 현실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한 채 나뉘어진 세상은 더 넓게 벌어져만 간다. 당연한 것인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내 작업실의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큼직한 레닌 흉상이 놓여 있다. 러시아 여행길에 큰 맘 먹고 구해 왔다. 유치하게 이념 잣대 들이대지 말라. 스스로 사회주의자라면 두 말 않고 커밍아웃한다. 하지만 그게 제도로서 망했다는 걸 누가 모르는가. 퉁명스럽게 쏘아보는 레닌 얼굴을 날마다 마주하고 있는 심정은 막장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에 대한 환기력 때문이다. 내가 아는 레닌은 이상주의자였고 그 이상에 대한 지혜로운 실천가였다. 그 뒤를 트로츠키가 이었으면 어땠을까. 독일혁명이 성공했다면 또 어땠을까.

부질없다는 심사가 다시 스트라빈스키의 선율을 불러온다. 막춤을 추고 싶다. 미친 듯이 팔, 다리, 엉덩이, 머리채를 제각각 따로 흔들면서. 그것은 미쳐 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시대의 춤, 이상주의가 실종된 세상의 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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