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자연주의 문학은 작품보다 이론이 앞섰다|서지학자 백순진씨, 통설 뒤엎는 새 주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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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 문학에 있어서의 자연주의는 이론이 등장하기 전에 작품이 먼저 발표되었으며 최초의 자연주의 문학론은 1922년 염상섭이 발표한 「개성과 예술」이었다』는 문학 이론상의 통설이 서지학자 백순진씨에 의해 뒤엎어져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백씨가 최근 발표한 『한국에서의 자연주의 문학 발생론』 (「한국 문학」 9월 호)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한국 문학에 있어서 자연주의 문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 (1919년),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1921년) 등 작품이 발표되기 4, 5년 전인 1915년 이미 소설가이며 비명가인 백대진에 의해 본격적인 자연주의 문학 이론이 발표됐다는 것.
이 같은 백씨의 주장은 원로 비평가 백철씨와 중견 비평가 신동욱·김윤식씨 등의 이론, 그리고 여러 평론가들에 의해 집필된 「한국 문학 대사전」「세계 문예 대사전」의 한국 자연주의 문학 이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서 이에 대한 시비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즉 백철씨는 그의 전집 속에서 『자연주의 문학은 그 문학 운동의 전개에 있어서 작품이 앞서고 이론이 뛰 따랐다』고 했고, 김씨는 『자연주의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한국적인 입장에서 제시한 문인이 염상섭이며 최초로 자연주의를 의식한 작품을 썼고 또 이를 대성한 자가 또한 그다』고 했으며, 신씨는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비평사적 언급이 전혀 없이 김동인의 일련의 초기 작품들을 자연주의 문학의 효시로 간주했던 것. 또한 두 사전도 자연주의의 「선 작품·후 이론」을 명백히 했다.
이에 대해 백순재씨는 그 자신이 발굴한 1915년에 발표된 백대진의 『현대 조선에 「자연주의 문학」을 제창함』이라는 논문을 소개하면서 한국에서의 자연주의 문학의 형성 과정이 「선 작품·후 이론」이라는 종전설과 달리 「선 이론·후 작품」의 정상적 변혁 과정을 통해 형성 됐다고 주장한 것이다.
백대진의 이 논문은 당시의 상황과 문학을 분석·비판하면서 『구문학은 몽상적 공상적 낭만적 환영적 문학으로…실 인생 실생활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고 지적, 『자연주의 문학이라 함은 소위 현실을 노골적으로 진직히 묘사한 문학이니 빈에는 허위도 무하며 또한 가식도 무하며 공상도 무한 문학』이라고 자연주의 문학의 정의를 구한 다음 『금일은 결코 몽상적 예술로 인하야 사회를 개조할 시대가 아니오 또 큰 반향을 요구할 시대가 아닌 즉 사실주의의 문학 곧 자연주의의 문학으로 이상을 작함이 가하지 아니한가』고 자연주의 문학의 필요성을 역설.
백순진씨는 이 같은 정의에 다소의 의문점이 있다해도 최초의 자연주의 문학론이라는 점에서 그 업적을 부정할 수 없으며 이 이론이 의식화하여 작품 생산의 과정으로 옮겨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김윤식씨는 백씨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당시는 외국의 이론을 번안한 급조된 문학 이론이 판을 치던 시대였으므로 그 일종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하고 그것이 백대진 자신의 순수한 자연주의 문학론이라면 고려해 볼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문학사적인 의미를 띨 수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 무렵 외국 문예 사조의 영향을 받았던 다른 문학 이론들도 우리 문학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이론으로 취급돼 온 점을 감안하면 「선 작품·후 이론」이냐 「선 이론·후 작품」이냐는 한국 자연주의 문학의 새로운 「이슈」로 그냥 지나쳐 버릴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정규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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