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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그림자 짙을수록 빛나는 인상파들의 예술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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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호 09면

1 앙리 제르벡스의 ‘발테스 드 라 비뉴 부인’(1889), 캔버스에 유채, 205 x 120.2 cm
2 앙리 루소의 ‘뱀을 부리는 여인’(1907), 캔버스에 유채, 167 x 189.5 cm

여자로 시작해 여자로 끝난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근대 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 오르세 미술관 展: 인상주의, 그 빛을 넘어’(5월 3일~8월 31일)는 앙리 제르벡스의 ‘발테스 드 라 비뉴 부인’의 화사한 초상화로 시작해 앙리 루소가 그린 작품 ‘뱀을 부리는 여인’으로 끝난다. 귀부인에서 시작돼 야생녀로 끝나는 상황을 문화사회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 이것이 이번 전시의 관전 포인트다.
전시는 예술을 사회·경제·정치적 발전 요인들뿐 아니라 인접 예술과 문화심리적 요소들을 고려해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최근의 학문적 트렌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회화와 조각뿐만 아니라 사진·드로잉·공예품·영화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작품 175점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근대 형성기의 파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르세 미술관전’ 5월 3일~8월 31일 국립중앙박물관

3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검은 모피를 두른 여인’(1892), 판지에 유채, 50 x 40 cm 4 카롤루스 뒤랑의 ‘앙포르티 후작 부인’(1875), 캔버스에 유채, 206 x 127.5 cm

1853년부터 시작된 도시 정비 사업과 다섯 차례의 만국박람회를 진행하면서 파리는 ‘수도 중의 수도’로 거듭나고 있었다. 방사선으로 뚫린 시원한 대로, 아름다운 공원, 철골구조와 유리로 된 현대식 건축물들이 들어서면서 파리는 ‘경이로운 근대’ 도시가 되어 갔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1889년에는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 완공됐다. 새로 단장한 시가지에는 잔뜩 차려 입은 멋쟁이들과 예술가들이 활보했다. 예술가들은 본능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아차렸고, 이 같은 변화에 열렬하게 반응했다.

이런 변화들을 보면서 시인 보들레르는 근대성의 특징을 “순간적인 것, 덧없는 것, 우연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인상주의자들은 이 “순간적인 것, 덧없는 것, 우연적인 것”을 포착해서 그대로 화폭에 옮겨놓았다. 모네는 빛과 대기의 미묘한 변화 속에 있는 자연의 한 순간, 힐끗 쳐다본 것 같은 ‘인상’을 그려내고자 했다. 모네와 인상주의자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새롭게 변모한 파리와 그 근교의 풍경을 그려 나갔다.

5 에밀 프리앙의 ‘그림자’(1891), 캔버스에 유채, 116 x 67 cm 6 앙리 에드몽 크로스의 ‘머리카락’(1892), 캔버스에 유채, 61 x 46 cm
7 루이 에밀 뒤랑델의 에펠탑 공사 사진(1885), 계란지에 인화, 34.4 x 44.6 cm

인상주의자들은 당시 전체 파리 미술계에서는 한 줌밖에 안 되는 작가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초기에 인상주의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인상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승리를 거두었고, ‘근대적 시각 혁명’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민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덧없이 흘려 보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의 취향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르누아르 같은 작가는 인상주의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인상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부유한 시민계급들이 원하는 귀족적인 취향의 초상화를 그렸다. 르누아르, 볼디니 등이 그린 초상화 속에서는 당시 사교계를 주름잡던 미인들을 볼 수 있다. 사치스러운 드레스 차림의 여인들은 행복하고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고, 삶은 에밀 갈레와 르네 랄리크 등이 만든 아르누보 풍의 장식품으로 호사스럽게 채워졌다. 이 시기를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라 부를 만큼 파리의 삶은 아름다웠고 풍요로웠다. 낭만, 사랑, 예술의 도시 파리의 이미지가 이때 완성된다.

8 조르주 가랑의 ‘1889년 만국박람회 당시의 에펠탑’(1889), 채색판화, 65.2 x 45.3 cm 9 폴 시냐크의 ‘아비뇽 교황청’(1909), 캔버스에 유채, 73 x 92 cm 10 프레데렉 소리유의 ‘퐁네프 다리에서 본 파리 최초 백화점 벨 자르디니에르’(1878 이후), 채색석판화, 52 x 66 cm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상주의자들도 1886년 제8회 전시를 끝으로 각자의 길을 간다. 새로운 미술을 위한 긴 여정들이 시작된 것이다. 인상주의자 모네의 화풍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쇠라와 시냐크 같은 젊은 작가들은 점묘파 화가들이 되었다. 인상주의자들이 보여준 “순간적인 것, 덧없는 것, 우연적인 것”을 넘어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을 품은 화가들이 등장했다. 이 화가들은 파리를 떠나 각자의 길을 갔다. 세잔은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가서 은둔자가 되었다. 그는 “인상주의를 미술관의 예술 작품처럼 무언가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고자”하는 과제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그림을 그려 나갔다. 번잡스러운 파리 생활에 지친 고흐도 1888년 파리 근교인 아를로 떠났다. 그는 파리 도시인들이 아니라 시골에 사는 농민들에게서 “영원에 근접하는 남자와 여자”를 발견했다.

고갱은 더 멀리 갔다. 그는 브르타뉴에 이어 타히티로 떠났다. 고갱과 상징주의 화가들은 지나치게 발전하고 세속화된 파리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문명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적인 열대지방에서 유토피아를 발견했다. 전시의 마지막은 앙리 루소의 ‘뱀을 부리는 여인’. 둥근 달이 뜬 어두운 원시림 속에서 신비한 흑인 여성이 뱀을 부리는 장면이다. 흑인 여성은 원초적인 생명력을 가진 순수한 존재로 자연의 상징이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앙리 루소는 세관원으로 일했고 평생 프랑스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앙리 루소가 그린 곳은 이성의 법칙보다는 마법의 힘이 지배하는, 원시림처럼 은밀한 그곳, 바로 인간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였다. 도시가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원시적인 것, 순수한 것에 대한 열망은 더 커져만 갔다. 그림을 봄으로써 21세기 도시인인 우리도 그 유토피아의 꿈에 기꺼이 가담하게 된다.

인상주의 특유의 밝은 색채, 그림 속의 많은 미소 짓는 사람들 덕분에 전시장은 전반적으로 명랑하다. 이처럼 미소 짓는 사람들,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그려진 시기도 드물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미소는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 근대가 인류에게 행복만 선물한 것은 아니다. 근대 사회 발전의 “부정적인 측면이란 곧 기관차는 탈선을, 자동차와 고속도로는 충돌을, 배는 침몰을, 비행기는 추락을 발명하고 마지막에는 대량 살육의 전쟁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뒤이은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대전은 우리에게서 이런 화사한 색채와 웃음들을 결정적으로 앗아갔다.

그 이후에 등장한 현대 미술은 고통과 비극, 공포와 눈물로 얼룩진다.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신물이 나도록 보아온 21세기의 우리. 마음의 상처가 많을수록 기어코 그곳, 태동하는 젊은 근대의 모습을 밝고 명랑하게 그려낸 인상주의 전시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상주의 관련 전시가 불황기에도 흥행불패의 신화를 이어가는 것은 우리의 불행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연 전시 오픈 첫날인 5월 3일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앞에도-휴일이었던 때문도 있겠지만, 관람객들이 번호표를 받아들고 한참을 기다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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