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이십 오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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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27년이 흘렀지만 우리에게 6·25는 한낱 지난날의 역사가 아니다. 지금도 지울 수 없는 악몽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우리는 이 악몽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해방시켜야만 한다.
그러려면 극복해야 할 6·25에 대한 철저한 반추가 앞서야겠다.
우선 6·25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적화통일의 집념과 비인간성의 산물이었음을-.
3년간의 전쟁에서 남북한 통틀어 군·민의 인명피해는 무려 5백만으로 추정되었다.
이중「유엔」군과 중공군의 피해를 감안하더라도 우리민족의 1할 이상이 생명을 잃거나 직접 신체상의 피해를 본 셈이다. 그 피해는 6·25의 2배 가까운 기간 지속된 2차 대전중 주요 교전국의 병력 인명손실과 비교해 보더라도 엄청난 것이었다.
2차 대전 중 연합국과 추축국 병사의 인명손실은 1천5백여 만이다. 이를 각국의 인구와 비례할 때 소련이 인구 22명중 1명, 독일이 25명중 1명 꼴로 가장 큰 인명손실을 보았다.
그 밖의 주요 교전국으로는 일본이 인구 46명중 1명, 영국과「이탈리아」가 각기 1백만 명중 1명, 중국과「프랑스」가 2백 명 중 1명, 미국이 4백50명중 1명 꼴의 인명손실을 냈다.
물론 이 통계는 전투원 중 사망 및 실종자에 국한된 것으로, 전투중 부상자와 민간인 피해가 모두 포함된 6·25의 인명피해와는 직접 대비에 약간의 오차가 감안되어야 한다.
그렇더라도 인명피해란 측면에서 6·25는 유례가 드문 대 참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민족의 참화가 오직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무모하고 비인간적인 집념에 의해 야기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적화통일 야욕에 추호의 달라짐도 없다. 바로 이 야욕을 지금도 무력에 의해 달성하려는데 우리민족의 비극의 뿌리가 남아 있는 것이다.
6·25는 또 한편 우리의 안일과 방심의 소산이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전혀 그 위기에 대비하지 못했다. 남침 당시 북괴는 전차 2백42대·장갑차 3백73대·각종 야 포 1천9백23문·비행기 2백11대·함정 30척의 중장비를 갖춘 20만 명의 잘 훈련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 국군은 소화기 정도밖에 갖추지 못한 10만 병력이 그나마도 안이하게 방심하고 있었다. 더구나 바로 그 전해에 강행된 주한미군의 철수와 한국을 극동방위선에서 제외한 당시 미 국무장관의 발언은 북괴에 대한 초청장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주한 미 지상군의 철수란 새로운 상황은 북괴의 오판 가능성을 높일는지 모를 요인이다. 그러나 지금과 그 때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우리의 대비태세와 역량이 그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지난 23일 중부전선에서 벌어진 육군 종합화력 및 공격훈련 시범은 우리 국군의 막강한 전투력과 군수산업 능력을 유감없이 입증했다. 동시에 이러한 막강한 화력은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 전투의 열도와 피해가 얼마나 극심하겠느냐 를 일깨워 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목표를 전쟁에서의 승리보다는 전쟁 자체를 막는 억 지력의 확보에 두어야만 될 이유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한미군이 전쟁 억 지력의 중요한 요소였다. 미 지상군이 보유한 전투력도 전투력이지만, 유사시 미국의 적극개입을 보장할 인계철선으로서의 정치적·심리적 억지 요소가 중요했던 것이다.
우리가 미 지상군의 전투력을 대체한다고 해서 그들이 지녔던 정치·심리적 억지요소마저 자동적으로 대체되지는 않는다. 주한 미 지상군 철수를 전제하고서도 6·25의 악몽을 극복할 만큼 우리의 대비가 완벽하려면 우리는 군사·경제·정치·사회의 모든 면에서 북괴를 능가하는 어려운 과업을 수행해 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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