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 때도 수많은 사전 징후 … '하인리히 경고' 잊지 말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1986년 5월 공동주택용지였던 서울 서초구 5만여㎡ 땅이 갑자기 상업용지로 바뀌었다. 삼풍백화점이 들어선 자리다. 공무원이 뇌물을 받고 불법 용도 변경을 묵인해주는 바람에 건물은 부실하게 지어졌다. 기둥 지름이 32인치(81.28㎝)에서 23인치로 줄어 약해졌고, 매장 공간을 넓히느라 설계도에 있던 내벽도 없앴다. 도면상으론 4층이던 건물이 불법 증축을 거치더니 5층으로 둔갑해 89년 12월 개장했다. 95년 4월엔 5층 식당가의 갈라진 천장에서 모래가 떨어져 사고를 예고했다.

 하지만 대책은 제때 세워지지 않았고 겉만 화려했던 ‘강남 최고급 백화점’은 그해 6월 29일 허망하게 무너졌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는 대형 사고 발생 이전에 수많은 소규모 사고와 징후가 나타난다는 ‘하인리히(Heinrich) 법칙’을 그대로 보여줬다. 미국 보험회사 트래블러스에서 일하던 H.W. 하인리히가 1931년 『산업재해 예방, 과학적 접근』이란 저서에서 처음 밝힌 법칙이다. 그는 약 5000건의 산업재해 분석에 근거해 경고성 징조를 무시하면 대형 사고가 빚어진다고 경고했다.

 292명이 목숨을 잃은 93년 서해훼리호 참사에서도 위기 징후는 예사로 무시됐다. 훼리호는 규정을 초과해 화물을 실었다. 사고 한 달 전 해운항만청 안전검사에선 고장 난 구명정이 합격 판정을 받았다. 휴가 간 항해사 대신 갑판장이 키를 잡았고, 승객 정원(221명)보다 많은 361명이 탑승해 구명조끼는 턱없이 부족했다.

 삼풍백화점과 서해훼리호 참사 이후 약 20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하인리히의 경고를 무시해온 사실이 지난달 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 수사에서 속속 확인되고 있다. 짙은 안개 속에 출항한 세월호는 화물 적재 기준을 묵살했다. 과적 때문에 복원력에 문제가 생겼는데도 평형수(平衡水)를 제대로 채우지 않았다. 선장과 선원들은 안전훈련도 받지 않았고, 구명보트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데도 한국선급은 지난 2월 안전검사에서 문제없다고 판정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규제 완화 차원에서 여객선 선령(船齡·사용 연한)을 25년에서 30년으로 연장했다. 해양수산부도 무리한 증축을 막지 못했다.

 국내에서 발생한 대형 참사는 이처럼 예외 없이 판박이 닮은꼴이다. 수십 년째 일상적 안전불감증→규정 무시→안전검사와 검증 미비→참사→늑장 대응→재난 컨트롤타워 부재→요란한 처벌→뒷북 대책 발표→망각→일상 안전불감증으로 이어졌다. ‘재난의 뫼비우스 띠’ 안에 갇혀 맴돌고 있는 것이다.

 고려대 박길성(사회학) 교수는 “한국 사람들은 ‘위험에 예민한 것은 비겁한 태도’라는 비정상적 모험주의, ‘나는 괜찮겠지’ 하는 이기적 예외주의에 빠져 기초적인 안전에도 무감각하다. 선진국처럼 안전 기준을 분명히 정하고 반드시 지키는 것이 기본이 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이명선(보건관리학) 교수는 “한국은 재난 뒤처리에만 연간 30조원 이상을 쏟아붓는다. 선진국과 후진국은 국민소득이 아니라 안전의식에서 차이가 난다”고 강조했다.

박현영·윤석만·정종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