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감정을 억압하는 남자들, 속으로 앓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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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형경
소설가

젊은 부부가 낳은 지 3주 만에 아이를 잃는다. 아내는 저녁 식사를 하다가, 한밤중에 잠 깨어 시도 때도 없이 잃은 아기와 자기 심정을 이야기한다. 남편은 아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는 해서 뭐하겠어? 그래 봤자 아이는 이미 떠났어.” 그렇게 응대하다가 나중에는 아내가 이야기를 시작할 기미만 보이면 자리를 피했다. 윌리 렘의 소설 ‘나는 알고 있다, 이것만은 진실임을’의 도미니크 부부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한밤중에 아내가 거실에서 죽은 아기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앉아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런 때 거실로 나가 아내를 안고 위로해주는 놈은 머저리일 거라고. 품위 있는 인간이라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나는 방바닥에 발을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침대에 앉은 채 아내의 말을 듣는 동안 우리가 꿈꾸던 인생이 유령처럼 떠나가는 듯 느껴졌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만약 그날 밤 아내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안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더라면 그 순간이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을 되살리는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하곤 한다.”

 슬픔 앞에서 도미니크는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아내가 자기 심정을 이야기할 때마다 간절히 원한 것은 슬픔의 의례에 남편이 동참해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러울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그는 자신이 “정말 머저리 같은 놈처럼 굴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회적 역할을 해내느라 버릇처럼 감정을 억압하는 남자들은 슬픔을 경험하면서 고통을 지나가는 애도 과정을 밟기 어렵다. 그 결과 더욱 고통스러운 감정 상태에 처한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남자들이 속으로 앓고 있다는 사실을 많이 이야기한다. 테렌스 리얼은 ‘비밀스러운 남성 우울증’, 제드 다이아몬드는 ‘과민성 남성 증후군’, 존 샌포드는 ‘남성적 무드’ 등으로 남자들의 특별한 감정 상태를 설명한다. 어느 날 문득, 이유를 모르는 채로 머리 위에 먹구름이 드리운 듯 의기소침하고 우유부단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럴 때 남자들은 흔히 타인을 비난하는 돌발 행동을 하기 쉽다. 전문가들마다 용어는 다르지만 제안하는 해결법은 똑같다. 친밀한 상대에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 기분이 어떤 것인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