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계에서-김기영 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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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화가의 글은, 그의 작품이 조형 언어라고 한다면 육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한 예술가에 대해서 그의 육성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품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 예술가를 우리가 사랑하는 경우다.
운보는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우리나라 화가 중의 한 분이다. 그의 천의무봉하고 힘찬 열정이 뭉쳐진 듯한, 활달한 선과 붓의 흐름을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대부분이 정적인 산수화 일변도인 우리나라 동양화단에서 유독 동적인 세계를 펼쳐 가는 그의 작품 세계를 나는 좋아한다. 이를테면 그의 말 그림들이 그렇다.
그리고 이번에 그의 육성들을 모은(거기엔 그의 소품들도 들어 있다) 그다지 부피가 많지 않은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나의 그러한 짐작이 과히 어긋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육성이니 만큼(육성은 대개 다듬어진 언어보다는 거칠다) 다소 거친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 속엔 그의 조형 언어(작품)만으로는 자상하게 알 수 없었던 그의 개인적인 비밀들에 대한 소박한 고백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청각을 잃게 된 내력은 물론 최근에 사별한 그의 오랜 동료였으며 반려였던 부인 우향에 대한 애절한 추모까지.
이 책은 그러므로 한 예술가의 창조의 세계를 엿보는 작은 창문 구실도 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한 예술가의 친근한 육성을 듣는, 그리하여 그의 내면을 엿보는 기회를 제공 해준다는데 그 소박한 뜻이 있다. 예술가의 내면은 그의 작품 세계처럼 멋지진 않지만 친근감이라는 또 하나의 매력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조해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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