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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함경도 촌뜨기 '인간 이성계' 살려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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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유동근은 “며칠 밤을 새도 집에 들어갈 땐 촬영의 연장선에 나를 두지 않는다. 카메라 앞 배우의 모습은 거기서만이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강력한 의지의 무장이자 카리스마적 제왕. 사극 속 태조 이성계는 그의 어진(御眞·왕의 초상화)처럼 위압적이고 꼬장꼬장한 인물로 그려지곤 했다. MBC ‘조선왕조 500년 추동궁 마마’(1983)와 KBS1 ‘용의 눈물’(1996~98) 속 태조도 그랬다. 누가 의뭉스럽고 우직한 ‘촌뜨기’ 이성계를 상상할 수 있었으랴.

 “왕복을 입었어도 촌뜨기가 본래 갖고 있는 순수함이 있다. 이민을 가도 고향을 그리워하듯 왕이 돼도 동북면(함경도)의 정서를 잃어버리지 않는 이성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유동근(58)은 KBS1 주말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 ‘시골 무사’ 이성계를 불러냈다. 촌티 풀풀 나고 고집 센 이성계는 인간미가 철철 넘친다.

 11일 촬영을 마친 그의 코밑은 허옇게 일어나 있었다. 수염을 붙였다 뗀 흔적이다. 얼굴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지만 목소리는 단단했다. 그는 “드라마 출연을 요청받고 대본을 펼치는데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게 함경도 사투리더라. 이거 한번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투리는 탈북자 출신인 백경윤씨가 매주 가르치고 있다.

 ‘정도전’에서 이성계는 모피를 단 갑옷을 걸치고 “그랬지비”, “했음둥”이라는 사투리를 투박하게 내뱉는다. 자기에게 숨겨진 야심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외려 동북면 변방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게 살길 꿈꾼다. ‘용의 눈물’에서 탤런트 김무생(1943~2005)이 연기한 이성계와는 전혀 딴판이다. 그는 “단순하지 않으니 표현이 힘들다. 차라리 야심을 줄기차게 뻗어내면 쉬울 것 같다. 작가도 쓰기 힘들 것이고 연출도 힘들 거다. 그 고민의 정성을 한 회, 한 회 운반하고 있다”고 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패기의 혁명가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위). 유동근(이성계·아래 왼쪽)과 서인석(최영)의 처절한 격투신. [사진 KBS]

 드라마 속 이성계는 시골 무사에서 이제 대업의 꿈을 본격적으로 꾸는 야심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시청률도 17~18%까지 올랐다. “드라마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상식보다 더 깊숙이 나갈 거다. 역사 속에서 최영 장군은 정몽주가 죽였지만 우리 드라마는 그렇게까지 그려지지는 않을 거다. 이성계와 이방원의 대립을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갈지는 나도 궁금하다.”

 사극 촬영은 길고 고되다. 고려말 명장 최영(서인석분)과의 격투신을 찍을 땐 전날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하루를 꼬박 보냈다. “밤을 새면서 단 한 번도 그 선배(서인석)도 의자에 앉지 않았고 저도 못 앉았다. 초코파이 하나 먹으면서 버텼다. 그래도 갑옷이 옛날에는 30㎏ 나갔는데, 이제 기술이 좋아져서 15㎏ 정도다.”

 수염붙이는 게 힘들다고 사극을 안 찍겠다던 철부지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드라마 ‘애인’을 찍으면서 인기가 올라가니까 대하드라마는 안 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애인’ 촬영장에 김재형(1936~2011) 감독이 네 번 찾아왔다.”

그렇게 시작한 ‘용의 눈물’로 그는 1997년 KBS 연기대상을 받았다. ‘용의 눈물’ 시절 연출부 막내였던 강병택 PD가 이번 ‘정도전’의 메가폰을 잡았다. 그때 인연을 맺은 강 PD가 이성계 역할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군소리 않고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유동근은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불륜에 빠진 로맨틱한 중년(애인, 1996), 광기어린 군주(용의 눈물), 무식한 깡패(영화 ‘가문의 영광’, 2002)의 이미지가 그와 겹쳐진다. 그는 “연기는 재주가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거듭된 반복 훈련에서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대본이 나오면 수십번 들여다본다. 그러면 표현의 범위가 넓어진다”고 했다.

 ‘용의 눈물’의 이방원과 KBS2 ‘명성황후’(2001~2002)의 흥선대원군 연기를 그는 잊지 못한다. ‘용의 눈물’에서 그가 이성계 앞에서 춤을 춘 뒤 품에 안겨 통곡하는 장면은 사극의 계보에서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그런 현장에서의 느낌을 그는 중시한다. “연기할 때 너무 계산을 하는 건 안 좋다. 현장에서 느낌대로 흘러가 주는 게 좋다. 주어진 연출 공간 안에서 느낌대로 발산하는 것. 그게 맞아떨어지면 보는 사람의 감흥은 더욱 커진다.”

 지금까지 맡은 배역 중엔 흥선대원군을 최고로 꼽았다. “흥선대원군 시대의 드라마틱한 부분은 몇 번을 해도 물리지 않을 것 같다. 신상옥(1926~2006) 감독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을 5번이나 연출해놓고도 또 만들어보고 싶은 게 그 시대라고 하더라.”

 그가 요즘 주목하는 배우는 누굴까. 의외였다. “전지현 같은 배우가 좋다. 몸에서 뿜어 나오는 뭔가가 배우 입장에서 봤을 때 보통이 아니다. 영화와 드라마 둘 다 히트시킨 것도 대단하다.”

이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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