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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없는 극장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 영화관에서 영화다운 영화를 보았다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전문가들은 물론, 진심으로 영화예술을 사랑하는 일반관객 가운데서도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찾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 영화애호가들 사이에선 으례 10년 또는 수십년 전에 본 옛 명화들이 준 감동을 말함으로써 현재의 황량한 우리 극장가를 통렬히 비난하는 소리뿐인 것이다.
20년전 6·25동란의 전화가 채 복구되지 않았던 시절의 극히 부실했던 영화관에서도 때때로 예술성이 뛰어나고 세계적인 화제를 담은 명화들이 상영되어 국민의 정서생활을 윤택케 해주고 문화창조에의 의욕을 북돋울 수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시민들은 궁색한 살림가운데서도 아낌없이 지갑을 털어 그 명화를 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맛보는데 인색치 않았었다. 그런데도, 값비싼 영사기와 호화로운 내부시설이 갖추어진 오늘의 한국 극장가에서 이러한 광경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은 어찌된 일인가.
요즘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그 흔해빠졌던 서부개척시대의 낭만적 정의의 사나이들조차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많은 청소년들에게 청순하고 도덕적인 사랑의 얘기를 들려주던 연인들의 얘기조차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사태를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외화를 아끼려는 국가시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영화를 관장하는 관료들의 비전 없는 영화정책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외화수입으로 낭비되는 아까운 돈을 줄이자는 데야 할말은 없다. 우리의 처지로선 부족하나마 한해에 40편 내외의 외화만으로 만족하라해도 그런 대로 참을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 40여편의 외화가 정말 볼만한 영화가 못된다는데 있다.
불행히도 지난 몇햇동안 당국의 엄격한 허가조건과 무자비한 가위질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참으로 영화예술의 적극적인 의미를 찾아볼 만한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기억은 없다.
재탕 삼탕으로 업자들의 돈벌이에나 봉사하는 몇몇 낡아빠진 대작영화와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중국 무술영화만이 영화가를 휩쓸었다면 지나친 말일까.
이런 분위기 때문에 외화 코터의 배정만을 노린 저질 국산영화가 연간 1백20편씩 양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부가 아무리 국산 우수영화제작을 독려하고 적극 지원하겠다고 나서봤자 영화다운 영화, 영화예술의 진면목을 보여 줄만한 영화를 본 일조차 없는 영화인들이 단 몇 편이나마 정말 영화다운 영화를 만들 의욕을 가지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처지에서 문공부가 최근 영화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외화수입창구를 일원화하는 조처를 통해 외화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은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제까지 영화제작업자들이 제각기 담당하던 외화수입을 영화진흥공사가 전적으로 떠맡아 불필요한 외화낭비를 더욱 줄이게 되었다는 소식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국내업자끼리의 지나친 경쟁, 외국인 상사의 중간폭리가 곁들여 비싼 값으로 사들여야했던 외화를 좀더 적극적인 기준아래서 선택해서 들여오자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가 취해졌다해서 곧 지금까지의 명화 없는 영화관시대가 종막을 고할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우선 외화수입작품 심의위원회의 구성부터가 불안하다. 이들이 만일 이른바 국책적인 건전성과 계몽성만을 강조할 때 영사막 위에 움직일 그림의 질은 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뻔한 영화에 실망할 관객들은 그간 저질영화에 식상할 대로 식상한 처지이기 때문에 번영하는 중진국에서 일어나는 영화암흑시대적 퇴보에 분통을 터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새로 발족하는 심의위가 국책 이외에도 예술성의 기준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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