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속으로] "일본 사람들이 안 와 … 완전히 끝난 것 같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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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자 사장이 ‘좋았던 시절’ 일본인 단골손님과 함께 찍은 사진에 대해 설명하며 비로소 미소를 짓고 있다. [김성룡 기자]

중앙일보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는 ‘현장 속으로’를 연재합니다. 이슈 현장에 있는 당사자의 시각을 가감 없이 반영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전하고자 합니다. 첫 회의 등장인물은 엔저(엔화 약세) 등으로 인한 일본 관광객 감소 때문에 40년 동안 하던 장사를 접을 위기에 놓인 남대문 터줏대감 ‘서울상회’의 유신자(59) 사장입니다. 자식뻘인 기자에게 격의 없는 말투로 털어놓은 솔직한 심경을 유 사장의 목소리 그대로 지면에 옮겼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만 40년째 장사하고 있어. 외국인 상대하는 잡화가게로는 ‘남대문시장 1호’야. 아버지 수산물가게를 처녀 때부터 돕다가 1990년대 중반에 업종을 바꿨어. 김도 팔고, 홍삼도 팔고, 송이버섯도 팔고…. 오래돼서 그런가 유명해. 일본 손님들이 우리 가게 사진이랑 지도를 프린트해 들고 찾아오더라고. 숭례문 쪽에서 남대문시장 들어오는 입구 쪽이니 목도 워낙 좋고. 대신 임대료가 비싸지.

 그런데 최근 2년 동안 계속 적자야. 남대문은 사실 말만 재래시장이지 외국인 고객 위주가 된 지 오래거든. 우리는 일본 손님이 대부분인데, 발길이 뚝 끊겼어. 다음 달 초가 골든위크(일본의 황금연휴) 아니냐고? 안 와, 안 와. 작년에도 안 왔어. 올해는 수학여행 학생들이라도 좀 와 주려나. 여행사에서 5~6명씩 단체로 올 때도 있긴 한데 물건을 안 사. 엔저에다가 일본 경기도 나쁘고 그렇다잖아. 게다가 알고 보니 서울역에 있는 대형마트로 그나마 다 빠져나가더라고. 예전에는 김 하나를 사도 우리 가게로 왔는데. 이제는 ‘홍삼 엑기스’도 마트에서 1+1 행사 한다잖아. 그러니까 해먹을 수가 없어.

 일본 사람 빠진 데를 중국 사람이 채운다는데 남대문은 아니야. 중국 사람 좋아한다는 홍삼으로 주력 품목도 바꾸고 중국어 안내문도 붙여 봤는데 중국 단체 관광객이 관광버스 타고 가는 가게는 따로 있더라고. 또 중국 사람들은 의심이 많아. 가게에 한국 사람만 있으면 안 들어와. 사실 그래서 작년에 조선족 직원을 구했는데 6개월 정도 일하다가 비자 만기가 돼서 2월에 중국 들어갔어. 그 직원이 없으니까 그나마 중국 손님이 한 명도 안 들어오네.

가게 벽에 붙은 일본 전화 주문(왼쪽)과 일본행 운송장으로 꽉 찬 ‘단골 공책’.

 빚내서 버티고 있지. 사실 울분이 터질 정도로 고통스러워. 은행 대출이 안 돼. 재산이네, 신용이네 따지는 게 많아. 내가 여기서 40년 장사한 것도 인정 안 해. 2년 전에 가게를 아들 명의로 바꾼 것 때문에 ‘40년 전통의 서울상회’가 아니라 2년짜리 가게가 돼 버리더라고. 이해가 안 돼. 할 수 없이 사채를 써. 남대문에 일수나 달러 빌려 주는 사람들 있잖아. 그 사람들은 날 믿으니까. 이 자리에서 40년 동안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설이고 추석이고 매일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장사하고 있으니 돈 떼먹고 도망갈 사람은 아니라는 거지. 그런데 사채는 이자가 너무 비싸. 은행 빚만 쓸 수 있어도 훨씬 나을 거야.

 그만둘 생각? 당연히 해 봤지. 지금이라도 당장 다 집어치우고 한국 사람 상대하는 칼국수 장사라도 하고 싶지. 그런데 내가 가게 그만두면 우리 직원들은 어떡해. 3명인데 최하 10년, 최고 30년 됐어. 식구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냥 끌고 가는 거야. 내가 일본어학원 다 보내서 공부시켰지. 외국어 하는 고급 인력이라 월급이 300만원 넘는 직원도 있어. 사실 봉급 5개월 동안 못 준 직원도 있어. 집 팔아서라도 내가 어떻게든 줄 거야.

 솔직히 일본하고는 이제 완전히 끝난 것 같아. 이런 장사는 거의 다 문을 닫을 것 같아. 우리 집은 일본 단골이 정말 많거든. (일본 주소가 적힌 운송장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두꺼운 공책을 보여 주며) 이게 전화 주문 받아 일본에 보내 주는 우리 ‘단골 공책’이야. 예전엔 한두 달이면 공책이 꽉꽉 찼었어. 15년 넘은 단골도 많지. (벽에 붙은 주문 종이를 가리키며) 이건 지난해 가을에 송이버섯 주문한 건데 이번 달에 와서 돈 준대. 지난달에 김 2만 엔(약 20만원)어치 부쳐 준 손님은 내년에 한국 와서 돈 준대. 그런데 이렇게 서로 믿는 단골들도 요즘 주문이 뚝 끊겼어. ‘욘사마’ 때는 정말 일본 손님이 물밀듯이 밀려들었거든. 김치초콜릿, 김초콜릿 같은 것도 잔뜩 사 가고. 말도 못했어. 중국 사람들이 과연 옛날 일본 손님 몰려오듯 그렇게 와 줄런가….

정리=구희령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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