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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차려입고, 청사초롱 들고 … 조선왕조로 가볼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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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달빛기행의 하이라이트는 부용지에서 펼쳐진다. 청사초롱을 든 참가자들이 부용지 주변을 걷고 있다. 웅장한 2층 건물이 주합루다.

서울시내 봄나들이 장소로 궁궐만 한 곳도 없다. 4대 궁(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 중에서 창덕궁 나들이가 가장 특별하다. 볼거리도 많지만 색다른 낮과 밤을 경험할 수 있어서다. 창덕궁을 관람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일반 관람권을 사서 제한된 공간만 둘러보거나 후원 특별관람 코스에 참가해 나무 우거진 궁궐 뒤뜰까지 가볼 수도 있다. 유일한 야간 관람 프로그램인 달빛기행은 참가 인원 제한이 심해 여간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게 아니다.

하루 100명만 초대받은 달빛기행

창덕궁 달빛기행이 5년째를 맞았다. 경복궁·창경궁도 수시로 야간에 문을 열지만 창덕궁의 밤은 다르다. 창덕궁에서는 ‘야간 개방’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궁궐 문을 활짝 열고 조명만 켜두는 게 아니어서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4~6월, 9~11월 음력 15일 앞뒤로 각 5일간 진행된다. 보름달이 두둥실 뜨고, 밤 산책하기에 가장 좋은 날만 골랐다. 7, 8월은 열대야와 모기 때문에 쉰다. 경복궁·창경궁은 야간 개장 때 한 번에 2000명이 들어와 북적거리지만 달빛기행은 하루 100명만 초대한다. 20명씩 무리를 지어 한복을 차려입은 해설사를 따라 90분간 궁궐을 둘러보고 전통공연도 감상한다. 외국인 참가자도 늘어 매달 1~2회는 외국인만을 위한 행사를 하기도 한다.

달빛기행이 매년 ‘1~2분 매진’을 기록하는 건 ‘소수정예’ 원칙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창덕궁은 예부터 각별히 관리됐다. 정부는 궁궐의 훼손을 막겠다며 1979년부터 25년간 창덕궁 후원을 폐쇄했다. 일반 관람권으로 자유 관람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2010년부터다.

창덕궁의 넓이는 43만㎡로, 전각과 정자는 모두 157동이 있다. 창덕궁은 낮에도 한 번에 관람하기가 버겁다. 방대한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부터 가슴 시린 근현대사까지 긴 세월의 사연이 빼곡해서다. 하여 달빛기행에서는 주요 명소만 들르고, 달빛 아래 야경이 좋은 장소만 찾는다. 돈화문(敦化門)에서 출발해 인정전~낙선재를 둘러보고, 후원으로 들어가 부용지~애련지~연경당을 둘러본다.

적막한 밤, 은은한 달빛 아래 궁궐을 거닐면 딱딱하게만 보였던 우리 역사와 문화가 새롭게 다가온다. 교과서 속에 박제돼 있던 조선왕조의 역사가 생생하게 살아난다.

창덕궁에도 봄이 내려왔다.

거문고 소리 들으며 임금이 걷던 길 산책

오후 8시, 돈화문에서 청사초롱을 받아들고 달빛기행에 나선다. 처음 마주하는 것은 금천교(錦川橋)다. 궁궐 안과 밖을 구분하는 다리다. 여기서 우회전, 조금 더 가다가 인정문 쪽으로 좌회전하면 웅장한 조명의 ‘인정전(仁政殿)’이 기다린다. 지난해 개방된 인정전 내부는 밤에 더욱 화려하다. 그러나 내부를 들여다 보면 기분이 씁쓸해진다. 1908년 설치된 전등·가구·커튼 등은 일제가 이식한 서양 문물이다.

인정전을 나와 낙선재(樂善齋)로 향한다. 청나라식 창살무늬가 깊은 밤 은은한 조명을 받아 더욱 신비하다. 뒤뜰을 지나 상량정(上凉亭) 앞마당에 오르면 보름달이 손에 잡힐 듯하다. “오늘밤은/잊으며/잊혀지며/사는 일이/달빛에/한 생각으로 섞인다” 해설사가 김초혜의 시 ‘만월’을 읊으면 가슴 속에도 보름달이 하나씩 차오른다.

만월문(滿月門)을 지나 후원에 접어들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부용지(芙蓉池)가 가까워 오면 거문고 소리가 달밤을 적신다. 과거를 치렀던 영화당(暎花堂), 왕실 직속 서고인 규장각(奎章閣)이 연못에 어른거리는 풍경은 달빛기행의 하이라이트다.

통돌로 만든 불로문(不老門)을 지나 연경당(演慶堂)으로 향한다. 효명세자가 아버지 정조를 위해 사대부 집을 본떠 만든 곳이다. 1908년 순종은 여기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연경당 앞마당에선 다과를 즐기며 전통공연을 감상한다. 구슬프고 구성진 가락이 마음을 적신다.

달빛기행 끝무렵. 청사초롱 불빛에 의지해 후원 숲길을 찬찬히 걸으면 어느새 돈화문이다. 보름달이 머리 위 중천으로 슬며시 자리를 옮긴다.

울긋불긋 꽃대궐이 된 봄날의 창덕궁.

후원·낙선재 뒤뜰에 가득한 봄 향기

은은한 달빛이 없어도 고궁은 충분히 낭만적이다. 낮에 창덕궁을 관람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일반 관람권으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주요 궁궐을 보거나, 숲이 우거진 뒤뜰 후원까지 가보거나. 10년 전 개방된 후원은 아직도 해설사와 함께하는 특별관람코스를 이용해야 한다.

후원에 들어서면 연못과 정자가 어우러진 절경이 연달아 펼쳐진다. 달빛기행에서 기묘한 분위기를 내는 부용지를 지나면 애련지(愛蓮池)가 나온다. 숙종과 장희빈이 애정을 나눴다는 애련정(愛蓮亭)이 연못 한 편을 장식하고 있다. 한반도 모양을 닮은 반도지(半島池)에는 부채꼴 지붕을 얹은 관람정(觀纜亭)이 있다. 맞은 편에는 화려한 단청에 지붕을 겹으로 올린 존덕정(尊德亭)있다. 새소리 들으며 숲길을 따라가면 인조 때 조성한 옥류천(玉流川)과 정자 5동이 보인다. 임금이 휴식을 취하고 신하들과 시를 짓던 곳이다. 볏짚 지붕을 얹은 청의정(淸<6F2A>亭)이 눈에 띈다. 정자 앞에 자그마한 논이 있다. 임금이 백성들의 풍년을 기원했던 곳이다.

이달부터 개방된 낙선재 뒤뜰도 들러보자. 안전 문제로 막아뒀던 곳으로, 일반 관람권만 있어도 들어갈 수 있다. 아담한 뒷마당이지만 나름의 멋이 있다. 화계(花階)에는 마침 매화와 앵두나무꽃이 피어 있었다. 신선사상을 엿볼 수 있는 괴석도 있다. 선조는 산 같은 모양의 괴석을 보며 상념에 젖었다고 한다. 비가 오면 괴석을 타고 내리는 물줄기가 폭포 같다.

창덕궁에는 아직도 발 들일 수 없는 공간이 있다. 낙선재 뒤편, 상량정과 소주합루로 가는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오직 달빛기행 때만 열린다. 언젠가 달밤의 궁궐 나들이를 해봐야 할 이유다. 물론 2분 안에 입장권을 잡을 정도의 순발력을 키워야 한다.

글=최승표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창덕궁 관람 정보

일반 관람권을 구입하면 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낙선재 등 창덕궁의 주요 전각을 관람할 수 있다. 어른 3000원. 후원 특별관람코스는 한번에 최대 100명까지 입장할 수 있다. 돈화문이나 함양문에서 5000원짜리 관람권을 따로 사야 한다. 창덕궁 홈페이지(cdg.go.kr)에서 예약할 수도 있다. 오전 10시∼오후 4시, 매시간 정시에 시작해 90분간 진행된다.

창덕궁 관람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 월요일은 휴관한다. 02-762-8261. 달빛기행 4~6월 입장권은 매진됐다. 9~11월 예매는 8월 중 인터파크(ticket.interpark.com)에서 진행된다. 65세 이상은 전화로도 예매할 수 있다. 1544-1555. 입장료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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