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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지하를 들여다보면 땅 위 세상이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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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역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딱 하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 그러니까 지하철 역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꼭 마주해야 하는 게 있다. 아니, 역 입구 뿐 아니라 승강장으로 이어진 통로, 심지어 개찰구 앞에서도. 뭘까. 바로 광고다. 귀한 시간 들여 챙겨보는 드라마, 심지어 내 돈 주고 보러가는 영화관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게 광고인데, 지하철 역에 광고가 있다는 게 뭐가 새삼스러울까. 하지만 지하철역 광고는 좀 다르다.

대단히 무작위적으로 거기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당히 타깃이 분명한 광고다. 심성욱 한양대 광고홍보학부 교수는 “지역 맞춤형 광고”라고 정의했다. “역을 둘러싼 상권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지하에 있는 지하철역 광고가 지상 상권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역할을 한다는 얘기다. 지하만 봐도 지상이 보이는 그 흥미로운 세상에 한번 들어가봤다.

지하철역 광고, 당신이 사는 동네를 말해줍니다

소녀시대 멤버 태연의 팬클럽이 지난달 2호선 홍대입구역 승강장에 붙인 광고.

지하철 2·3호선 환승역인 교대역,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출입구계단 옆 통로엔 여느 지하철역이 그러하듯 광고판이 즐비했다. 그런데 뭔가 좀 달랐다. 각기 다른 광고였지만 광고문구는 모두 ‘이혼·가사’ ‘상속·채무’ ‘형사사건’ ‘기업회생’ ‘의료법률’ 등 법률 용어가 가득했다. 특히 6·7, 10·11번 출구엔 각자 전문 분야를 알리는 법률사무소·법무법인 광고가 많았다. 역 이름은 교대역이지만 사실 이 지역은 서울고등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이 있어 인근에 법률사무소가 밀집한 곳이다. 법률 광고가 가장 많은 출구 위로 올라가니 눈 앞으로 층마다 법률사무소 간판이 내걸린 빌딩이 숱하게 보였다. 광고가 법률사무소 밀집지역을 안내하는 방향표 역할까지 하는 셈이다.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메트로에 의뢰해 교대역 광고를 분석해봤다. 총 79건 중 39건(49.4%)이 법률 광고였다. 전체 광고판 절반이 한 업종에 몰려 있는 것이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교대·서초역은 서초 법조타운과 맞닿아 있는 역이라 법률 광고 수요가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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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특성을 보이는 지하철역은 이곳 하나뿐이 아니다.

 3호선 압구정·신사역이 대표적이다. 압구정역엔 총 135개 광고가 있는데 이 중 106개가 제약·의료업종이다(4월 1일 기준). 10개 중 8개는 병원 광고인 셈이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게첨된(벽에 붙어있는) 제약·의료업 광고 대부분이 성형 광고”라고 말했다. 신사역도 마찬가지다. 이곳의 성형 광고만 보면 제2의 압구정역이라 불러도 될 정도다. 60개 광고 중 37개(61.7%)가 제약·의료업종이기 때문이다. 또 대부분이 성형 광고라는 것도 똑같다. 잘 알려진대로 압구정동과 신사동은 전국에서 성형외과가 가장 밀집한 지역이다. 강남구에 있는 성형·피부과 의원 479곳 중 256곳(53.4%)이 압구정동(행정구역상 신사동)에 있으니 말이다. 지하철역 광고와 해당 지역 상권의 주요 업종이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걸 확연하게 보여준다.

 황장선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지하철 광고는 소매업종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고급화 전략”이라고 말했다. 자본이 풍부하지 못한 소매업 입장에서 비교적 싼 비용으로 큰 노출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광고 매체가 지하철역 광고라는 얘기다. 황 교수는 “성형외과 의원이나 법률사무소는 고관여 상품(High involvement production, 구매를 앞두고 많은 시간·노력을 들여 정보를 얻고 선택하는 상품)이기는 하지만 압구정동이나 서초동 같은 곳은 워낙 많은 업체가 몰려 있기 때문에 소비자가 변별력을 갖기 어렵다”며 “2~3군데 후보를 정한 상태에서 지하철역 광고를 본다면 ‘이곳은 성업 중’이라는 인식과 신뢰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지하철역 광고는 광고이기에 앞서 업체의 ‘두번째 간판’ 역할을 한다”며 “건물 구조상 업체들은 영업하는 곳에 간판 1~2개만 설치할 수 있는데 인근 역에 광고를 하면 다른 업체 보다 (소비자에게) 먼저 자기 업체를 알릴 수 있기 때문에 역 내에 광고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법칙은 다른 지하철 역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중·소형 공연장이 몰려있는 4호선 혜화역은 118개 광고 중 90개가 연극·뮤지컬 광고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면 버스 정류장 광고도 비슷한 패턴을 보일까. 확인 결과 전혀 달랐다. 지역 소매업체 광고는 지하철역에만 몰렸다. 버스정류장 광고보다 훨씬 싸기 때문이다. 압구정동 등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의 버스정류장에 광고를 하려면 해당 지역만이 아니라 최소 10개 지역 정류장에 해야 한다. 그것도 강남엔 2개 밖에 할 수 없다. 단가는 1600만원(한달 기준)으로, 지하철역 전광판 광고(300만원)의 다섯 배가 넘는다. 광고대행사 그리다파트너스 이윤성 대리는 “버스 정류장 광고가 대형 스포츠·패션·음료 업체 광고로 채워지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하철역 광고가 처음부터 이렇게 지역(Local) 중심형 광고는 아니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국내 대기업 광고가 상당수였다. 심 교수는 “10여년 전만 해도 대기업에서 자기네 브랜드·제품 광고비용을 지하철역에 사용했다”며 “지역 소매업종 광고가 큰 비중을 보인 건 비교적 최근 현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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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변화는 1995년 5호선 개통을 시작으로 2000년 6호선, 같은해 7호선 일부 구간(건대입구~온수) 개통 등 지하철 호선이 늘어난 게 주요 계기였다. 자연스레 지하철 이용객이 여러 역으로 분산된 탓에 기업들은 예전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해야만 기존같은 광고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 거다. 여기에 모바일 등 뉴미디어 광고로 선택 폭이 넓어졌다. 박현 CJ파워캐스트 디저털사이니지사업부장은 “호선과 역이 늘어나면서 비용 대비 광고 효과가 준 데다, 대기업 입장에선 평면적인 지하철역 광고형태가 신선하지 않다고 판단해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며 “2005년 이후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대기업이 빠져나간 자리에 지역 소매업체들이 들어왔고, 지금같은 ‘간판형 광고’ 트렌드가 자리잡은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한국의 월가(Wall Street)라 할 수있는 여의도역엔 금융 광고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하철역 광고가 지역 상권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대기업은 비껴나 있다는 얘기다.

 최근 급부상한 광고도 있다. 팬클럽이 특정 연예인의 생일 등을 축하하는 광고(이하 연예인 광고)다. 대부분 아이돌 그룹 멤버가 주인공인다. 재밌는 건 분명 광고인데 상업성은 전혀 없다.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과 7호선 청담역에 유독 이런 광고가 많다. 압구정역도 간간이 이런 광고가 붙는다. 지난 2~3월엔 30일간 아이돌그룹 동방신기 멤버의 생일 축하 광고가 게시되기도 했다. 지난달 27일 찾은 청담역엔 그룹 비스트의 이기광 생일 축하 광고가 붙어 있었는데 광고주는 중국 팬클럽이었다. 이 역들에 연예인 광고가 유독 많은 이유가 있다. 역 근처엔 SM엔터테인먼트와 큐브·JYP 같은 대형 연예기획사가 있다.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를 스쳐보기라도 하려고 압구정로데오역과 청담역엔 소녀팬과 외국 관광객이 많이 몰리고, 그렇다보니 이들의 눈을 만족시키는 관련 광고가 이곳을 점령하는 거다.

 4호선 명동역과 2호선 홍대입구역·건대입구역·왕십리역 역시 연예인 광고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이 인근엔 대형 연예기획사는 없지만 팬층인 젊은층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 이런 광고가 많다. SM엔터테인먼트 홍보 담당자는 “요즘은 팬클럽이 점조직화해 해당 아이돌 광고를 낸 광고주가 누구인지는 기획사도 모른다”며 “한류를 좋아하는 외국 관광객이 몰리는 곳에 광고를 하는 걸로 짐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특수상권을 제외한 서울의 수백 개 지하철역엔 어떤 광고가 가장 많을까. 게임·병원·영화가 독보적이었다. 5~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도시철도공사가 올 2월 신규로 계약한 광고 건수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장 많은 건 게임(80건)이었고, 병원(56건)과 영화(38건)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지하철 이용자에게 가장 많이 노출되는 광고는 영화다. 서울도시철도공사 관계자는 “영화는 한 (계약) 건당 한 개 노선 전체 역에 광고를 하기 때문에 실제 노출로는 가장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광고 기간은 짧은 편이다. 이 관계자는 “불특정 다수가 고객인 대표적 업종이 영화이기 때문에 할수없이 전체 역에서 광고를 하지만 개봉을 앞두고 짧게는 보름, 길어도 한 달을 넘지 않는 단기성 광고”라고 말했다.

 이는 현재의 지하철역 광고 트렌드와도 맞닿아 있다. CJ파워캐스트 박 부장은 “장기적 노출을 통해 기업의 브랜딩(Branding) 효과를 노리는 대기업보단 단기간에 이슈를 전달하려는 업체에게는 지하철역이 여전히 매력적”이라며 “영화나 공연, 원서 접수를 앞둔 대학교 광고 같은 시즈널(seasonal)한 광고 수요가 많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지역 중·소형 병원 광고가 많은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5~8호선 광고대행을 맡고 있는 스마트채널 김진구 팀장은 “지하철역 주변은 교통이 좋고, 이런 곳에 몰리는 대표적 업종이 병원”이라며 “출·퇴근 때 계속 광고에 노출되는 지역 주민이 주 고객이라 지하철역 광고가 제격인 셈”이라고 말했다.

글=조한대 기자 ,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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