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서정시가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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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시는 역시 공자도 말했지만 사무사의 경지이며 사무사는 곧 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시는 사회구조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인지 서정시의 바탕이 되는 순수한 정서를 배제, 부정하는 것 같아요. 좀더 절실한 인간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박=아닌게 아니라 사회성을 띠는 시가 더욱 많아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가령 고은 씨의 『황사며칠』(한국문학), 김종해 씨의 『겨울 근황』(현대문학), 권오운 씨의 『원님 전상서』(한국문학) 같은 작품들을 들 수 있겠는데요. 『황사며칠』은 약소민족의 비애를, 『겨울근황』은 침묵의 미학을, 『원님 전상서』는 서민생활의 슬픔을 각각 노래하고 있어요. 물론 이와 같은 시들이 기법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 처져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사회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불순한 느낌을 주게 된다, 이런 점이 고려돼야겠지요.
김=그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겨울근황』같은 작품은 까마귀를 주도적인 「이미지」로 제시하여 그 자신의 상징으로 삼으려한 점이 주목됩니다. 현대시의 유력한 기법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이 달의 수작으로는 송수권 씨의 『등꽃아래서』(문학사상)를 꼽고 싶습니다. 이 작품은 한국 서정시가 갖춰야할 2개의 요건,‥곧 순수한 감성과 그를 제시할 수 있는 말솜씨를 고루 갖추고 있어요. 다만 이 시인의 수사력이 문제인데 앞으로 언어 절제에 좀더 신경을 쓰면 상당한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보기에 따라서는 언어구사가 활달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전편이 연쇄적인 비유 위에 엮어져 있는 결구의 우수함도 취할 점이구요. 김남조씨의 연작시 『촛불』(한국문학) 도 사랑의 감정과 종교적 존엄성이 화합되어 있으며 시가 가지는 최단적 생략미를 추구하여 좋게 보았습니다.
김=그 작품은 한 대상에 대해 여러 개의 「이미지」를 제시하고자한 연작시인데 간결한 가운데 산뜻한 비유들이 호감이 가요. 정한모씨의 『음력변』(월간중앙)도 발상과 「톤」은 다르지만 비슷한 면에서 호감이 가는 작품이었습니다. 이탄씨의 『얼굴』(현대문학)은 형이상파 시인들의 기법을 연상케 하는데요. 이 시인은 언어 구사만 좀더 익숙해지면 새로운 시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박=김후란씨의 『층계』(한국문학)는 정감을 배제시킨 사변적인 시입니다. 이런류의 시가 갖기 쉬운 메마름으로부터 구제되고 있는 것은 종행에 자연적 사상을 투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보입니다. 감성을 배제시킨 단적인 예로는 강우식씨의 『사행시초』(현대문학)를 들 수 있겠는데, 이 시인이 즐겨 다루는 관능적인 것은 미적으로 승화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김=되풀이해서 말씀드리지만 서정시를 시의 본령으로 본다면 우리 현대사회에서 서정시는 너무 외롭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달에 여류시인 동인인 「청미」가 동인지 제4집을 내놓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몇몇 작품들이 시선을 끌더군요.
박=「청미」와 함께 신춘문예 출신 시인들의 모임인 「육성」도 동인지 2집을 내놓았지요. 동인운동이 쇠퇴해 가는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들 두 동인지 출간은 동인운동에 활력소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동인들이 서로 시의 경향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은 더 구체적으로 얘기가 돼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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