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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나선화 문화재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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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동영상은 joongang.co.kr [최효정 기자]

초한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 윤동주(1917~45) ‘초한대’ 중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즐겨 읽었던 윤동주의 시는 짧은 동시에서도 언제나 그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특징이 있다. 촛불이 타들어가면서 초가 녹아내리는 형상을 마치 경건한 제사의 풍경과 분위기로 묘사한 이 시는 읽을 때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우리 집안 제사의 정경을 떠올리게 한다.

 집안 어른들 하얀 모시옷의 조용한 움직임, 은은하게 비쳐 보이는 촛불은 나의 기억에 제사의 상징이다. 그 때문에 기도를 모르던 나는 촛불 앞에서 항상 마음을 정화하고 사사로움을 내려놓는 경건한 제사장이 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어둠을 촛불로 밝히는 일이 없기에 한 촉의 초가 켜진 공간이 재실이 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나에게 이 세상에 맑고 밝음이 더하기를 원하는 기도가 필요할 때면 나도 모르게 윤동주 시 ‘초한대’가 떠오르며 마음의 촛불 앞에 서게 되었다.

 밝은 빛은 언제나 새 길을 보여주는 희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생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 풍요를 베풀어 가는 행로임을 믿기 때문이다.

나선화 문화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