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전의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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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풍경화가로 손꼽히고 있는 「존·컨스테이블」도 처음에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었다.
그가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된 것은 「프랑스」에서 그의 작품들이 높이 평가된 다음부터였다.
만년의 그는 장난기가 생겨 익명으로 「아카데미」에 출품했었다. 심사원의 대부분의 의견은 낙선이었다. 그러자 심사원석에 앉아 있던 「컨스테이블」이 말하기를, 『그것은 제 그림입니다. 역시 여러분은 알아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림을 평가하기란 이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도 평가를 못 받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화단이란 폐쇄적인 때문이기도 하다.
일요화가로 유명한 「앙리·루소」도 「앙데망당」전 출신이다. 「아카데미』에 출품할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었다.
그러고 보면 「루오」·「브라망크」·「샤갈」 등 현대미술의 거장 중에서 「아카데미」를 거친 사람은 거의 없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프랑스」에서는 화가의 등용문은 「아카데미」가 아니다. 젊은 화가를 키우는 것도 관선 심사원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국전이 화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국전을 거치지 않고 화가로서의 평가를 받는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을 정도다. 심사위원의 세도가 대단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심사위원만 잘 만나면 낙선 작이 특선으로 뽑힐 수도 있었다.
기이하게도 화단, 특히 동양화부문에서는 도제제도의 유풍이 강하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내가 키운 제자의 작품을 밀고 싶다는 생각도 날 것이다.
그러나 정실만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심사위원들은 자기의 작풍을 닮은 작품들에 더욱 친화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대가가 된 다음의 「컨스테이블」의 작품을 낙선시킨 영국「아카데미」번사원들도 꼭 작품을 제대로 보는 눈이 없어서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새달에 열리는 국전부터는 공개심사를 하기로 한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정실·불공정 등의 잡음은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도 같다. 심사위원이 자기 제자의 작품이라 해서 고집부리 기는 어려워 졌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국전의 수준이 향상되리라고 크게 기대하기는 아직 이르다.
예술이란 그 본질에 있어 동시대에 그대로 받아들여 지기는 어려운 것이다.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서만 새로운 창조가 가능한 것이 예술이다.
문제는 이만한 너그러움(?)이 국전의 심사위원들에게 있느냐 하는데 있다.
참다운 예술가와 직업화가와는 엄격하게 갈라진다. 아깝게도 지금까지의 국전이 후자를 더 많이 키워냈다 한다면 혹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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