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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운동은 왜 일어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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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1운동을 주제로 하는 첫 좌담에 참가한 우리는 이 문제를 ⓛ3·l운동은 왜 일어났는가, ②3·1운동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③3·1운동은 무엇을 가져왔는가. ④3·1운동은 우리 한국사상에 또는 세계 약소 민족해방운동상에 어떤 구실을 했는가-하는 네 가지로 문제를 나누어 각 문제를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처음에 『3·1운동은 왜 일어났는가』를 문제삼아 대충 다음과 같이 의견을 모았다.

<「민족자결」의 한계>
3·1운동의 첫 단계를 주도했던 「49인」(수안사건관계 2인 포함)에 대한 재판기록은 그 첫머리에서, 이 운동이 미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부터 발단이 된 것이라고 하였다. 「윌슨」자신은 처음에 이 문제에 대하여, 강대국의 위협아래 있는 모든 약소민족에 밝은 앞날을 기약케 함으로써 세계평화를 이루어보리라는 일종 이상주의적인 정신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원칙이 현실적인 국제정책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결국은 패전국의 영토처리라는 면만이 두드러지게 되고 독, 오-홍, 토, 노의 네 제국이 1차 대전으로 사라진 뒤에 많은 새 민족국가들이 「유럽」과 서「아시아」에 탄생된 데에 그친 것이었다.
이 민족자결의 대원칙은 1차대전이 끝나던 해인 1918년 정초에 「윌슨」이 전후처리방안으로 내세운 「14개 조안」의 일부로 발표된 것이었지만, 그 구상은 벌써 미국이 참전하기 전부터 산발적으로 표명되어왔다.
이리하여 미국·중국의 교포들, 일본의 우리 유학생들은 비교적 일찍부터 이에 대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고, 「3·1선언」에 한걸음 앞선 동경유학생의 「2·8선언」도 그 결과의 하나였다. 혹심한 언론통제 속에 있던 국내에서도, 상당수의 식자층은 3·1운동 몇 달 전부터 비밀리에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논의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윌슨」의 이 대원칙이 곧바로 우리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일본은 1차 대전에서 어쨌든 전승국의 일원이 되었고 또 어떤 전쟁에서든지 전승국에 불리하게 전후의 영토문제가 처리된 일이란 없는 법이라, 우리는 어느 의미에서 조건이 불리하기조차 한 것이었다.
뒤에 3·1운동이 터지자, 일본관헌측은 『조선과는 아무 관계없는 민족자결이라는 말로 망상을 일으켜 외국의 웃음거리나 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사뭇 비웃는 태도로 악선전을 했다. 그러나, 이번 민족자결 원칙으로 우리의 독립이 달성되기는 어려우리라는 그 한계는, 3· 1운동 지도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재판기록에도 그것이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 지도자들은 이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소위 보호국이 되어 나라가 망한지 10여년, 이 시점에서 민족의 독립을 부르짖는 큰 매듭이 한번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한가지 덧붙여 둘 것은, 3·1운동이 1917년의 「러시아」「볼셰비키」혁명의 영향아래 일어났다고 하는, 외국일부의 견해에 대해서다.
노령의 교포들이 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3·1운동 전에 당을 조직하고「블셰비키」에 가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상이나 조직이 이때 국내에 들어와 있었던 흔적은 전혀 없고, 도리어 국내의 3·1운동이 노령의 교포사회를 분발케 했던 것이다. 또 국내에 계급운동이 일어난 것도 3·1운동 후 몇해가 지난 1920년대 전반기부터였다.

<무단정치-헌병정치>
우리에게는 비록 한계가 있는 것이었지만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의 한 동인이 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적어도 국내에서는, 민중속에 이것이 폭넓게 전파되어 있던 것은 아니고, 도리어 소수의 식자층사이에서 오고간 이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이 마침내 저 대폭발을 일으킨 것은, 그 힘이 어디서 온 것인가. 그 하나는 일본의 통치, 그 자체가 민중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몰고간데에서 왔다.
이 당시 일본 통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헌병경찰제였다. 장관인 헌병사령관이 경찰을 총지휘하고, 헌병장교와 헌병하사관을 장으로 하는 각급 경찰이 헌병·경찰관·헌병보조원(조선인무뢰한들을 채용)을 부려, 민중의 저변까지 파고들어 가서 일체의 저항 요인을 낱낱이 싹에서부터 꺾어버리는 공포정치의 체제였다.
합방 후 3·1운동까지의 조선총독부 통치를 흔히 「무단정치시대」라고 물러왔다. 그러나 이 기간은 무단이라는 용어도 해당될 수 없는 최악의 상태였으므로, 차라리 헌병경찰제라는 특징을 좇아 「헌병정치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하는 학설도 있다.
일본의 군사경찰이 한반도로 진출한 것은 일·노 전쟁직전부터지만, 헌병경찰제가 본격화한 것은 을사조약이후 의병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진 뒤부터였다. 이때 헌병대장으로 온 저 악명 높은 「아까시」(명석원이랑)는 의병l만5천을 살육한 공로로 합방이 된 뒤에도 헌병경찰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3·1운동 때는 대만총독)
이 가공할 제도의 밑을 받쳐주는 것이 「범죄즉결례」니 「경찰범처벌규정」이니 하는 것이었다. 이들 법령이 규정한 범죄라는 것은, 예컨대 『함부로 타인의 신변에 다가서거나 또는 추수하는 자』까지도 해당될 만큼 그 범위가 지극히 넓어서, 한마디로 헌병·순사의 눈에만 거슬리면 즉결로 형(주로 태형)을 받도록 되어있는 것이었다. 또 「민사쟁송조정령」이라는 것은, 헌병 경찰에게 민사사건의 조정권을 주어, 주로 일본인 지주나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보살펴 주는 것을 사실상의 목적으로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또 「조선태형령」이라는 것을 내렸다. 일본은 명치유신 때에 태형을 이미 폐지한 뒤였는데, 『조선고유의 형』을 존중한다고 하여 새삼스레 이것을 제도화한 것이다. 『태를 맞으면 남의 등에 업혀 나오는 것이 보통』, 『태 90이면 죽음 아니면 폐인』, 『태를 맞아죽으면 시체는 그날 밤으로 행방불명』…이라는 당시의 기록들은 이 야만적인 형벌의 실지가 어떠하였는가를 말해준다. 이 태형이 헌병개개인의 즉결권에 속해있었던 것이다.
감옥의 실태도 너무나 가혹하였다. 감옥사무는 합방 전에 벌써 일본에 넘어가 있었지만, 합방당년의 총독부 기록으로도 『수용밀도가 최고 1평에 8∼9인』이라고 하였다.
일본의 조선통치제도는 대만통치의 선례를 모방한 것이고 그 대만의 경우는 영·노의 총독정치를 참작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 통치의 경우, 영국인은 그 대본만을 쥐고 직접의 대민접촉은 현지인이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 상례이었다. 말단의 행정기관원이나 벽촌의 잡화상까지도 일본인이 나서게 한 일본의 식민지통치와는 저절로 다른데가 있었다.

<쪼들려만 가는 생계>
일본세력의 한반도 진출은 생계상으로도 민중을 나날이 피폐로 몰아넣었다. 몇가지 저례를 들어보자.
일·노전쟁이 일어나던 해 재정고문으로 온 「메가다」(목가전종태낭)는, 화폐제도의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화폐제도를 일본과 같게 함으로써 장차 한국경제를 일본권내로 편입하기 위한 예비적인 조치이었지만, 여기에는 또 하나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이 「신화폐조례」에 의하면, 종래의 백동화를 3종으로 나누어, 질이 좋은 갑종은 제값대로의 신화로 바꿔주고, 별반 좋지 않은 을종은 반값 이하로 바꿔주고, 아주 나쁜 병종은 교환을 안해주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종래 정부의 남발·사주·밀수 등으로 이렇게 악화가 생겨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 유통되던 화폐의 3분의2가 교환자격이 없는 병종이었고, 그 대부분이 한국인의 것이었다. 더구나 많은 일본인들은 이 화폐개혁의 기밀을 미리 알아내서. 양화는 일본인에게로 집중되고 쓸모 없는 악화의 대부분은 한국인의 수중에 남게되어 파산자가 속출하는 공황이 일어났다.
일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양화를 사들여 신화로 바꾼 일본인들은 값이 극도로 떨어진 구화를 다시 사 모으고, 아직도 화폐개혁의 내용을 잘 모르는 한국인 농민들로부터 토지를샀다. 농민들은 고가로 응하는 일본인 상인들에게 토지를 팔아 넘겼지만, 그들이 수중에 쥔 화폐는 이미 재값이 아니었던 것이다.
합방 몇 해 전에 설립된 동양척식회사라는 것은, 식민지 수탈체제의 표본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이 동척은 뒤에 농업경영, 토지 건물의 매매대차, 수리사업 등 여러 방면으로 사업을 벌였지만, 처음에 목적으로 한 「척식」이란, 한국으로 진출하는 일본인 농민을 한국정부의 책임 하에 정착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은 한국정부로 하여금 방대한 면적의 전답과 임야를 내놓게 하고, 빚투성이의 재정속에서 매년 거액의 보조금까지 내놓게 하고는, 한편으로 일본인 이민을 모집하여 이주비와 1인당 평균2정보의 토지를 대주어, 일본인은 무일푼으로 한국으로 건너와도, 총독부의 여러 비호밑에서 쉽사리 자작농이 되고 곧 지주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날로 늘어가는 일본인 이민의 많은 수가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조선인의 토지를 저당 잡아 금원을 빌려주고는, 기일 내에 갚지 않았다느니 하는 이유로 가차없이 그 토지를 횡탈하는등,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치부를 했다.
합방직전부터 3·1운동 직전까지 여러해에 걸쳐 실시된 소위 토지조사라는 것은, 토지의 소유권을 분명히 하여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지만, 그 조사과정에서 제도상의 농간에 의한 조선인 토지의 탈취가 뒤따랐다.
『충독부 말뚝』이라는 말이 있었다.
토지조사의 관계법령에 의하면, 토지 소유자는 자기땅 사원경계에 푯말을 박고 거기에 소유관계의 까다로운 여러 조항을 적어 넣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농촌 실정으로는, 이 낮선 푯말을 규정대로 소정기일안에 만들어 세우지 못하는 수가 물론 많았다.
일본인들은 그런 토지를 사냥꾼처럼 찾아내어 멋대로 제 말뚝을 박았다. 이렇게 된 땅은 헌병대나 경찰서의 채찍으로 지켜져 결코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불법 말고도, 이 토지조사사업은 제실재산에 속하는 토지의 대부분과 역둔토의 전부,그리고 삼림의 58%를 일본인이나 일본회사의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때까지 세습으로 경작하던 소작인은, 이제 지주의 눈밖에 나면 언제든지 경작지를 내놓아야 하는 계약소작인이 되었다.
토지조사 사업은 이렇게 토지의 소유관계를 법적으로는 확립시켰지만, 경영관계에는 아무런 근대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고, 갈수록 궁핍해지는 농가경제로 자작농의 소작농화는 더욱 촉진되었다.

<자주독립에의 갈구>
일본인으로 말미암아 태를 맞은 사람, 살육을 당한 이의 자제, 재산을 빼앗기고 파산이 된 사람, 그밖에 온갖 곤욕을 당한 사람…그 수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3·1운동의 거센 물결이 밀려 닥쳤을 때,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3·1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민중생활을 극도로 궁지에 몰아넣은데서만 원인을 찾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독립선언서가 그 벽두에서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다고 하였듯이, 민족의 독립 자주에 대한 향념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해, 일본이 만일 우리의 생활을, 더 향상시켜 주었더라면 3·1운동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닌 것이다. 3·1운동이 그야말로 각계와 각층에서 일어난것도 그 때문이다.
을사오조약이 있은 직후부터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비록 합방 전에 그 주력이 꺾었지만, 합방후인 1914년까지만 해도 일본병력이 출동해야만할 정도의 활동이 몇 건인가 있었고, 그것이 국내에서 완전히 없어지기는 3·1운동 몇 해 전인 1917년이었다. 3·1운동은 이러한 저항의 전통 위에 선 것이었다.

<참석자>
김용덕(한국사·중앙대교수)
이보형(한국사·서강대교수)
조기준(경제사·고대교수)
천각우(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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