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패러디 파라다이스] 노리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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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호 30면

나를 상상해 보시오 당신이 상상하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오

내 이름은 아저씨 아저씨
언제나 그녀는 나를 그렇게 두 번 불렀지
내가 그 아이를 알게 된 건 삼십 년 전
하늘에 불이 붙은 것처럼 놀이 타던 저녁
그러니까 내 나이 스물두 살
그녀의 나이는 다섯 살 어쩌면 여섯 살
추억이여, 당신은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벌써부터 목이 타 가슴이 심장이 타
불이 붙은 것 같아 저녁 하늘처럼 놀이 타
이제부터 그녀를 노리타라고 부른다
노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노-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노. 리. 타.
그때 우리 집은 쌀과 연탄을 팔았다
나는 방학 때면 집에 내려와 자전거를 타
쌀과 연탄을 배달했다 아파트 놀이터
그 아이도 자전거를 타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나 살에 피가 나
나는 들고 가던 쌀을 내려놓고
그 아이를 일으켜 세워 달래고
내가 한 건 그것밖에 없었는데
다음날부터 그 아이는 아침에 눈을 뜨면
세수하고 예쁘게 옷을 차려 입고 가게로
달려와 날 불렀지. 아저씨 아저씨
하루 종일 나만 바라보았지.
엄마가 데려가려고 하면
노리타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지 떼를 썼지
안 간다고 아저씨 아저씨 옆에 있겠다고
자기가 고집을 세우기로 맘만 먹으면
아무도 당해낼 수가 없이 멋대로였다

그 고집이 귀여웠어 사랑스러웠어
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때는 몰랐어 나는 노리타
그 아이에게 잘 칠 줄도 모르는 기타
쳐주며 노래도 불러주고 그렇다
종이로 배도 접어주고 학도 만들어주었다
동화책도 읽어주고 놀이터
데려가고 연인처럼 내 손을 꼭 잡은 노리타
내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공연히 자의식적이 되어 안색을 완전히 바꾸고
눈을 굴리며 손등을 뺨에 갖다 대고
스커트 자락을 잡아당기고

어느 날 오후 내 여자친구가 놀러 왔다가
그 아이를 보고 너 참 귀엽게 생겼구나
몇 살이니? 이름은? 말을 걸었는데
입을 꾹 다물고 마치 연적을 바라보듯
여자친구를 노려보던 노리타
머쓱해진 여자친구 내게 얘 누구야? 묻자
자신이 연인이란 걸 밝혀주길 기대하던
110센티미터 19킬로그램의 숙녀 노리타
이 꼬마? 놀 친구가 없는지 맨날 놀러 와
내 말을 듣고 실망과 배신, 분노로 불타던
버림받은 여자의 눈빛 상처 입은 자존심
훌쩍거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던 노리타
채 자라지 않은 등뼈가 흔들릴 정도로 울던
다섯 살 숙녀의 뒷모습 하늘에 놀이 타
내 가슴에 심장에 불이 붙은 것 같아
그 후 노리타는 오지 않았어 기다렸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방학이 끝나도록
지난 일요일 이강훈 작가의 개인전 보러
가로수길 갔다가 마주친 삼십대 여성
첫눈에 알았지 그녀도 나를 알아보는 눈치
여행의 끝, 잿빛 목적지, 나의 친구들이여,
나의 악마들이여, 드디어 이곳에 왔구나, 끝이다

내 이름은 아저씨 아저씨 아는 체했는데
나를 모른다는 거야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한가지 위로라면 그녀가 어울리던 사내애들을
보았는데 개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는 것

** 컬러 부분은 모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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