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허정씨|대담 이종복<사회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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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과정 수반이었던 우양 허정씨의 서교동 집에 이르는 계단에는 얼음이 깔려 있었다.
조용한 응접실은 냉기가 감도는 듯 싸늘하다.
8순을 넘은 전 재상 댁에는 별로 인기척이 없다.
『선생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신관은 전보다도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한운야학으로 자적하니 편할 수밖에. 또 요새는 하루걸러 20리쯤 걷고 있으니 아직도 다리 힘은 젊은이 못지 않아. 조용한 시간에 혼자 「골프」장을 한바퀴씩 돈단 말이야. 쑥스러운 얘기지만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셈이지.』
『해도 바뀌었는데, 좋은 말씀이라도 들려주십시오.』
『좋은 일이 없는데 좋은 말이 있겠소. 노인은 회고에 산다지만, 요새는 가끔 상해·「파리」·「뉴욕」에서 「우리도 언젠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세워 보겠다」고 부지런히 쫓아다니던 일들이 생각나는군.
그 무렵에야 어디 좌·우를 따졌나. 나도 이동휘 선생의 웅변을 듣고 참 존경했지.
흔히 애국심이란 원시적인 감정에 바탕을 두어, 자칫하면 배타에 흘러 때로는 잔인한 행동까지 일어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어. 우리는 정말 자유와 민주란 꿈속에서 서로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일했지.』
『선생님께서도 일제시대에는 좌익과 접촉한 일이 있으셨나요.』
『물론이지. 김두봉은 친한 친구였지. 아마 그 친구가 김일성 대신 정권을 잡았더라면 상당히 달랐을 거야.
나는 해방 후 한민당의 창당 「멤버」로 총무를 맡았던, 이를테면 극우의 노선을 지켜온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당시 좌익 하던 사람들을 덮어놓고 나무라지 만은 않아. 우리가 오랫동안 전제에 시달리다 일본의 지배를 받게되니 오죽이나 차별이 심했나. 그래서 평등을 그리던 차에 해방을 맞으니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려면 공산주의를 해야겠다고 순진하게 생각했겠지. 그 사람들은 월북한 뒤 바로 숙청 당했어. 참 불행한 일이야.』
『우리 민족의 불행이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하지만 나는 우리 민족에겐 불행을 이겨내는 큰 힘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에게 그런 힘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아 남았겠나. 나는 좀 언짢은 일이 있을 때마다 민중의 힘을 믿고 길게 보아 낙관하고 있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민중의 자각이 있는 한 모든 게 제자리를 찾으리라고.』
『운동하시는 일 말고도 더러 출입을 하시는지요.』
『얼마 전에 새 국회의사당엘 가봤지. 정말 굉장하더군. 그런데 우리 형편에 그럴 게 뭐 있나 싶었어.
동양 제일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분수를 맞출 줄 알아야지. 우리가 일하던 때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규모도 달라졌지만, 기구가 늘고 인원이 많아졌다고 반드시 일의 능률이 오르는 건 아냐. 요즘 뿌리 뽑겠다는 부조리의 온상이 바로 그 비대한 기구에 있다는 생각도 나는데, 공룡의 교훈을 새겨야지.』
우양은 잠시 창밖에 눈을 돌리고는 나라 살림의 규모와 거기에 맞는 「모럴」에 관해 다시 말을 이었다.
『자주국방이나 자립경제가 돈 없이는 안 되는 일이지만, 행정기관에서는 몇 억, 몇 십억씩 하는 돈을 너무 쉽게 써버리는 것 같아. 일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나름대로 고충도 있을 테고, 나도 되도록 이면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지만, 국민의 부담이 좀 지나친 편이지. 물론 어려운 때니 참아야겠지만, 오래 참다간 지치는 수가 많지.』
『젊은이들과도 더러 만나는 일이 있으신 지요.』
『가끔 날 찾아오지. 그 중에는 불평을 털어놓는 사람도 있고. 난 그 불평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럴 때마다 정치란 그리 단순한 게 아니라고 타일러 보내지.
훌륭한 젊은이를 보면 고개가 숙여지는 때도 있지만 대마초나 피우는 학생을 생각하면 정말 한심스러워. 선진사회가 움직이는 규범을 빼고 물질문명만이 들어오면 큰 일이지.』
오랜 국사를 통해 쌓아진 경륜이 엿보이는 그의 말은 같은 어조로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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