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장토론 규제 풀라 독려했지만 대통령 말에도 꿈쩍 않는 구청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승투자개발이 서울 영등포구 양평로에 ‘가족호텔’을 지으려 하자 인근 아파트 일부 주민이 ‘러브호텔’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고 있다. [김형수 기자]

2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양평로 136. 중소기업인 ㈜한승투자개발이 지난해 3월 사업비 600억원을 투입해 314개의 객실을 갖춘 관광숙박시설(가족호텔)을 지으려 했으나 지금도 덩그러니 공터로 남아 있다.

 사업주인 한승투자개발이 지난 10일 영등포구청에 사업계획 승인을 신청한 터라 관광진흥법 시행령(15조)에 따라 12일 만인 22일에는 처리 결과가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하자 구청이 처리 기한을 넘겼고 4월 5일까지 1차 기한이 연장됐다.

 지난해 3월 토지 매입 이후 사업주는 학교에서 50∼200m 거리의 상대정화구역에 호텔 등을 지을 수 없도록 한 학교보건법 규정 때문에 7개월을 허송했다. 서울시교육청을 상대로 행정심판까지 간 끝에 유흥주점을 설치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교육 관련 규제를 간신히 통과했고 구청의 건축 심의도 통과했다. 그러나 올 들어 구청에 사업 승인을 신청한 뒤 일부 주민이 “초등학교로부터 170m 떨어진 곳에 호텔이 들어서면 교육권을 침해한다”며 뒤늦게 집단 민원을 제기했다. 유흥주점을 설치하지 않기 때문에 러브호텔이 아닌 가족호텔이라는 사실은 구청 공무원들도 대체로 인정하지만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원 처리에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이 호텔 규제 논란은 지난 20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직접 주재한 1차 규제개혁장관회의에서 소개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지춘 한승투자개발 전무는 그날 회의에서 “사업 추진 1년째 (구청장의) 재량권 규제와 싸우고 있다. 행정 절차를 무시하는 구청의 재량권을 중앙정부가 규제해 달라”고 호소했었다.

 당시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관광숙박업을 유해산업으로 규정한 학교보건법 등 규제 때문에 ) 저희도 정말 미치겠다”고 토로했고, 박 대통령은 “현실에 안 맞는 편견으로 인해 청년들 일자리를 막는 것은 죄악”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나 달아올랐던 ‘끝장토론’이 끝나자 그뿐이었다. 본지 취재 결과 영등포구청의 입장은 토론회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대통령은 일자리 창출을 외쳤지만 지방자치단체의 과잉 규제와 공무원들의 뒷다리 잡기식 행태는 개선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토론회 다음 날인 21일 영등포구청의 상급 기관인 안전행정부가 후속 대책 마련을 위해 움직였다. 안행부 당국자는 21일 영등포구청 고위 인사를 만나 “신속하게 처리되도록 노력해 달라”고 협조를 구했으나 구청으로부터 “사업주가 나서 주민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말만 들었다. 이해관계자의 동의를 받으라는 법 규정은 어디에도 없지만 구청이 중소기업에 임의로 규제를 추가한 셈이다.

 조길형 영등포구청장은 그날 내부 대책회의를 열긴 했지만 사업주와 주민 측에 각각 “서로 원만히 해결하라”며 협조 공문을 보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이 전무는 “ 대통령은 규제를 풀라고 독려해도 행정 일선까지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구청장이 대통령보다 더 높다는 느낌마저 든다”고 허탈해했다. 사업 승인이 늦어지면서 사업주는 시간이 갈수록 피해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 전무는 “토지매입비와 부대비용으로 이미 200억원이 집행돼 묶여 있는 등 사업 지연으로 인한 고충이 크다”고 말했다.

 구청 공무원은 오히려 사업주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한 공무원은 “동네에서 집을 짓더라도 먼지·소음을 의식해 주민들에게 떡이라도 돌리는데 (사업주 측이) 법 절차만 강조한다. 반대하는 주민을 사업주가 설득하지 않는 상태에서 구청이 먼저 나서 (사업승인을) 해 주면 모양새가 나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주민은 “일자리가 생기면 지역 주민을 우선적으로 고용하겠다고 사업주가 약속하라”는 또 다른 요구도 하고 있다. 이 전무는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기업의 민원 을 해결해 줄 책임을 구청이 지지 않고 주민 반대라는 집단 민원을 기업이 해결하도록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글=장세정·채승기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