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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양보밖에 모르는 외교관|「솔제니친」의 「키신저」 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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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다음은 「슐레진저」 전 미 국방장관의 해임에 충격을 받고 「키신저」 미 국무장관의 정책을 신랄히 비판한 소련 망명자가 「솔제니친」의 글을 「헤럴드·트리뷴」지에서 전재한 것을 요약한 것이다.<편집자 주>

<슐레진저 해임에 환멸>
「케네디」가 암살되었을 때 미국에 대해 우리가 느꼈던 연민의 정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많은 옛 전우들과 소련에 감금된바 있는 옛 수인들이 느꼈던 놀라움과 환멸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미국의 사법기관이 암살범의 배후를 밝혀 내고 범죄를 명쾌하게 조사할 만한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그 환멸은 더욱 큰 것이었다.
우리는 강력하고, 끝없이 자유에 대해 관대한 미국의 얼굴이 오점으로 얼룩졌다고 느꼈었다. 우리의 신념이 흔들렸다.
사건의 면모는 달랐지만 나는 「슐레진저」 국방장관의 해임에 대해 비슷한 환멸을 느꼈다. 또 한번 미국은 모욕을 당한 것이다.
「포드」대통령이 「슐레진저」를 해임시킨 것이 전적으로 합법적임을 나는 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이익이나 선거 전략만으로 통치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제도란 한심한 것이다. 합법성보다 우위에 서는 것으로서 양식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슐레진저」의 해임으로 기뻐할 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해졌다. 그의 해임은 비슷한 운의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인물 즉 「키신저」와 관련이 있다는 풍문이 나돌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내가 지난여름 미국에 체재하고 있을 때 「키신저」의 성격을 평가하라는 신문의 직접적인 질문에 답변을 피했었다. 그러나 요즘 그가 의기양양해 있고 그의 행위에 대해 이날까지도 맹목적인 평가가 퍼져 있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없이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키신저」는 끝없이 양보만 하는 자신의 정책을 변호하기 위해 거의 주문처럼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핵전쟁에 대한 다른 대안을 지적 해 보라』고.
무엇보다도 이 말이야말로 「키신저」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말이야말로 그가 전혀 외교관의 자질이 없음을 드러낸다.

<핵전 겁낸 패배주의자>
대안이란 「라틴」말로 「둘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하나의 대안은 2개의 가능성 사이의 한가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두개의 가능성 사이-. 이것은 과학적인 개념이지만 그러나 과학적 상황이라도 때로는 훨씬 광범한 선택을 허용한다. 그러나 외교는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이며 바로 인간의 본질에 관한 예술이다. 대안을 바탕으로 외교를 하는 것은 외교를 최저급의 가장 조잡한 수준으로 깎아 내리는 것이다.
과거에 얼마나 수많은 위대한 외교관들이 빈손으로 적절한 힘의 뒷받침 없이 군사적으로 나약한 상태에서 지성과 심리적 수단을 써서 아무 것도 양보하지 않고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으면서 협상에서 승리했던가.
「키신저」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핵전쟁 뿐』이라는 위협을 가하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패배시키고 있다. 그는 이와 똑같은 핵전쟁에의 공포가 그의 적대자의 마음속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똑같은 상황과 똑같은 위협 아래 그의 적대자들은 항상 승리하고 있으며 그는 항상 굴복하고 있다.

<인지·아주·유엔서 무책>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미국은 핵무기를 최초로 세계에 선보인 나라다.
그 때문에 미국은 국제적인 입장이 더욱 약화되어야 하고 국제 정치에서의 위치를 포기해야만 한단 말인가.
나는 「키신저」가 경험이 없어 공산국가의 지도자들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래서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그들에게 속고 있다는 주장에는 동감하지 않는다.
또한 「키신저」가 세인이 평하는 것처럼 고도의 외교 기술을 가졌다는 주장에도 이의를 갖고 있다.
서방세계의 30년 역사 중에서 최악의 외교적인 패배인 「파리」 평화협정은 「인도차이나」 3개국의 공산화를 위해 길을 터준 것이었다.
「키신저」는 8월 15일 『「헬싱키」에서 수세에 몰린 것은 우리가 아니었다』고 말했는데 3개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렇다면 수세에 몰린 건 누구였단 말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세계적 지위를 양보하는 과정은 마치 눈사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모든 단계에 있어서 세계적인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점점 어렵게 돼 간다. 그래서 더욱더 양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소련에 의한 서남「아프리카」의 침투, 「유엔」에서의 표결 등 전 세계적으로 새로이 조성된 현상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도덕적 평화는 허상>
「키신저」는 이에 대처할 비상 탈출구를 항상 확보하고 있다. 그는 대학으로 옮겨가서 순진한 젊은이들에게 외교술을 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나 젊은이들에게는 아무런 비상 탈출구도 없는 것이다.
「키신저」가 좋아하는 또 다른 논의가 있다. 핵 시대에 있어서 평화는 역시 도덕적으로 지상 과제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대량 학살이나 월남의 형무소를 평화의 소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단 핵시대에만 국한되는 진리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악한 형태의 폭력이나 수백만 인민에 대한 사악한 행위라도 용서하는 평화라면 그런 평화는 슬프게도 핵시대의 상황에서라도 도덕적인 숭고성을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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