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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50년9월15일, 인천상륙에 성공한 아군은 28일수도 서울을 재탈환했다.
국군은 감격의 복진을 계속하고 학연구국대 또한 감격의 서울입성을 했다.
그러나 견지동 나의 집은 완전히 폐허가 돼있었다. 다행히 죽은줄만 알았던 아내와 장모는 어느새 상경, 참담한 몰골로 나를 반겼다.
장인은 8월9일 폭격에 맞아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님 또한 전주형무소에서 퇴각하는 인민군에 의해 학살됐다.
얼마후 학연구국대 또한 해산 당하고 말았다. 당시의 전황은 10월1일엔 38선을 돌파하고 10월엔 원산, 22일엔 북청, 그리고 26일엔 선두가 압록강에 육박할 정도였다.
경인지구 계엄사령관은 이제 전쟁은 끝난 것인 양 일체의 학도병을 해산시켜 버렸다.
나는 조병옥 내무장관과 협의해서 선무공작반을 편성했다.
당시 국군은 북진을 계속했지만 이북점령지역의 민심수습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경찰을 보낼 수도 없었다. 경찰은 북한 주민을 자극할 염려가 있고 특히 평양은 미군정지역이라 우리의 행정권이 미치지 못했다.
평남도지사도 미8부 민사호에서 임명한 김성주지사가 있는가하면 우리 정부에서 임명한 김병연지사가 따로 있었다.
화폐도 한국은행권과 북괴통화·미군「달러」가 병용되는 판이었다.
따라서 조박사는 미군과의 마찰을 피할겸 학연구국대를 내무부 선무공작대로 편성해서 평양에 보내기로 했다.
10월 초순, 송원영 오홍양 양근춘 박영철 이재교(이상 고대) 김수용(공대) 김낙율(서울의대) 정용한(연대) 정윤백(성균관대) 양현종 고병현(한양공) 장시각(영창) 김윤경(선린) 김달영(도상)등 56명은 내무부 선무공작대로 서울을 떠났다.
이들은 사리원에서 어둠이 짙기를 기다린 다음 자정 무렵 평양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불출의 집에 들어갔다. 유명한 만담가인 신불출은 평양시 수옥리(제1극장뒤)에 어마어마한 저택을 갖고 있었다.
첫날을 뜬눈으로 밤을 밝힌 일행은 그 이튿날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평양 황금동에 있는 「노동신문」강당에서 평양학생을 상대로 강연회를 가졌다.
그런데 강연중 황사인 김모군이 『우리는 여러분을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시키는대로 하라』고 하자 평양학생 몇이 일어나 『우리도 전국학연의 투쟁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 모인 학생들은 누구 못지않게 반공투사』라면서 평양기질을 과시했다. 주동자는 윤영환(평일고)이었다.
윤군은 46년초 학연이 최동하·윤한구등 대북공작대를 평양에 파견했을 때 양득영(광성) 김찬수(숭상)등과 함께 우리의 사업을 지원한 학생-. 이날도 그는 평양학생들을 몰고와 서원했다.
일행은 곧 윤군을 통해 평양학생들을 소개받고 전국학연평양연맹의 결성에 나섰다.
당시 전국학연은 이미 해체되었으나 반탁운동을 전개할 당시 그토록 가고싶던 평양엔 기어이 깃발을 꽂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난관이 많았다. 첫째 학연조직은 대학생이 중심이 돼야하는데 대학생이 거의 없었다. 당시 평양엔 김일성대학·김제공과대학이 있었지만 이들은 거의 공산사상에 젖어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할수 없이 이사갑(약전) 김찬호(체전) 윤재열(철전) 김봉열(사전) 백경사 송일남(이상음전) 채재덕(평일고) 김춘근(평이고) 김선애 심정숙(평일고여)등을 중심으로 평양학연을 결성했다.
위원장 윤영환, 조직 박사건(평일고), 총무 오명환(평이고), 그리고 사무실은 시공관 뒤 최현(인민무력상)의 집을 썼다.
이들은 전국학연·선무공작대와 함께 강연반·연예반을 편성, 각지를 순방하며 북한주민을 계몽 위문하고 무고한 백성이 공산다응로 몰려 처단되는 것을 막아냈다.
한편 송원영은 평남도청 공보실장, 오홍양은 역산처장, 정윤백 고병현은 용강군수와 서장, 김수용은 강서서장을 맡아 미곡창고의 현황을 판악하는등 대민공작에 앞장섰다.
특히 송원영은 학연의 선전국장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 북괴지인 「민주조선」을 접수하여 서울에서 발간되는 남한신문의 평양판을 발행하는데 힘쓰고 북괴가 숨기고간 대량의 신문용지를 찾아내어 선전용지로 썼다.
또한 오홍양은 「김강산」「모란봉」「증산」이라는 북한담배를 대량 서울로 보내, 당시 동화백화점(현 신세계)에 전시했다.
그러나 11월초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다시 눈물의 퇴각을 거듭하고 학연공작대는 12월 3일 평양을 철수했다.
남으로 남으로 뻗어가는 피난대열은 38선을 넘으며 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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