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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기 칼럼] 쌀시장 개방, 결단의 시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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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호 34면

“우리나라에 1000여 마리가 넘는 반달곰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전국의 농장마다 비좁은 철창 우리에 갇혀 사육되는 반달곰들이 많다는 것을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이 반달곰들은 1980년대 농가 소득 증대를 위해 러시아나 동남아 등에서 들여온 500여 마리가 발단이다. 몇 년 동안 키운 뒤 수출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농가마다 앞다퉈 수입했다.

그러다 1993년 우리나라가 멸종 위기에 놓인 야생동물의 국외 반출을 금지한 ‘국제거래협약(CITES)’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수출 길이 아예 막혀 버렸다. 파는 것도, 함부로 죽일 수도 없었다. 정부도 엉거주춤하는 몇 년 새 판로가 막힌 곰들은 새끼에 새끼를 쳤다. 계속 불어난 곰들은 처치 곤란한 골칫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

이 이야기는 어떤 상품의 시장 진입을 허용한 뒤 자유로운 거래를 막게 되면 그 부담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다. 대책 없는 수입은 결국 재고(在庫)로 고스란히 이어져 시장 교란요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쌀 시장도 그렇다. 한국은 2004년 미국·중국 등 쌀 수출국과의 협상을 통해 시장 개방을 10년간 미루기로 했다. 대신 외국 쌀을 40만8700t까지 의무적으로 수입해 주는 조건(MMA)을 달았다. 지난해 국내 쌀 생산량(423만t)의 10% 수준이다. 혹여 국산 쌀 값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입 쌀의 일부(10~30%)만 떡이나 막걸리 제조에서 쓰되 나머지는 시장에서 철저하게 격리해 관리하겠다는 게 당시 정부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쌀 소비가 줄어드는 마당에 남아도는 수입 쌀은 창고에만 차곡차곡 쌓여갔다. 정부가 자세한 쌀 재고량을 밝히고 있진 않지만 넘쳐나는 수입 쌀 역시 이제 골머리를 앓는 반달곰 신세가 돼 버렸다.

올 연말이면 국내 쌀 시장 개방을 미뤘던 10년이 다 된다. 앞으로 여섯 달 뒤인 9월까지 세계무역기구(WTO)에 시장 개방에 대한 입장을 전달해야 한다.

의무수입 물량을 더 늘려주는 한이 있더라도 시장 개방을 다시 몇 년간 미루자고? 의무수입 물량을 늘리느니 수입 쌀에 관세를 붙여 시장을 개방(관세화)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주장을 들어보자. 현재 국산 쌀값은 수입 쌀의 약 2.5배에 달한다. 관세를 200% 이상 매기면 수입 쌀 가격이 국산 쌀 가격보다 높아진다. 비싼 수입 쌀은 시장에서 팔리기 쉽지 않기 때문에 국산 쌀에 별 타격이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웃 일본·대만마저 이미 쌀 시장을 개방한 상황이다.

쌀이 남아도는 게 정 문제라면 식량이 모자란 북한에 주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 경우 남북 교역의 국제법적인 해석 문제부터 풀어야 하는 게 더 큰 걸림돌이다. 남북 교역을 무관세의 민족 내부거래로 규정한 우리와 달리 WTO에선 관세를 물어야 하는 국가 간 교역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기 때문이다.

바뀐 입맛 때문에 쌀을 덜 먹는 사회 풍조도 감안해야 한다. 우리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지난해 67.2㎏에 그쳐 사상 최저 수준까지 내려갔다. 군부대에서까지 장병용 배식 쌀이 줄어들고 ‘軍데리아’ 햄버거나 반찬을 늘린 ‘웰빙 식단’이 등장하는 판이다. 이미 패스트푸드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쌀밥 한 그릇을 더 먹자고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은 마치 ‘쌀’이라 써 놓고 ‘햄버거’라 읽는 격이다.

쌀 협상이 타결됐던 10년 전에도 비슷한 내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반달곰은 커녕 쌀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하루라도 빨리 소비자의 수요가 반영돼 가격과 수급 조절이 이뤄지는 자유로운 시장 경쟁이 생겨나고 이를 견딜 수 있는 우리 농업을 만들어야 한다. 이 참에 쌀 관세화를 통해 시장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쌀 문제가 뭐 그리 복잡하냐고?

일단 오늘 아침 식탁에 차려진 쌀밥 한 그릇부터 거뜬히 비워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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