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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47> 여수 금오도 비렁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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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인 미역널방. 아찔한 절벽이 해무가 낀 여수 바다에 우뚝 솟아 있었다.

봄의 지표는 무궁무진하다. 얇아진 옷차림, 터지는 꽃망울, 흩날리는 비를 보며 새 계절이 온 것을 안다. 봄에 벌어지는 변화 중에서 가장 마법 같은 변화는 발 밑에서 펼쳐진다. 겨우내 얼어 있던 흙이 봄볕에 녹으면서 새살처럼 보드라워진다. 차진 흙을 자근자근 밟는 기분은 오묘하다. 흙은 상춘객을 위로하듯이 두 발을 잠깐 품었다 놔준다. 봄이 오는 길목 week&이 걸은 여수 금오도 비렁길의 흙도 그러했다. 금오도 비렁길은 청산도 슬로길과 더불어 남도 섬을 대표하는 탐방로다. 2010년 1, 2코스를 먼저 개통했고 2012년 3, 4, 5코스를 마저 완성했다. 모두 18.5㎞다. 지난달 27일 모두 12㎞에 이르는 비렁길 1∼3코스를 걸었다. 여수 앞바다 금오도의 흙이 멀리서 불어오는 살가운 봄바람에 몸을 풀고 있었다.

섬사람의 고된 인생을 품은 길

오전 7시45분 여수 돌산 신기항에서 출발한 배는 20분 만에 금오도 북쪽 여천항에 닿았다. 섬에 내리자마자 빨간 꽃을 피운 동백나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전날 내린 봄비 덕분에 붉은 동백꽃이 더욱 붉었다. 하늘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비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비구름 걱정은 잠시뿐이었다. 남면사무소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나오자 하늘이 말갛게 개었다. 눈이 부셔 바다를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거 봐, 섬 날씨는 아무도 몰러.” 민박집 주인 할머니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할머니를 따라서 배낭을 멘 관광객 무리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나왔다.

먼 바다에서 날아드는 갈매기는 희한하게도 ‘응애 응애’ 하고 울었고, 이 나무 저 나무로 재빠르게 몸을 옮기는 작은 새는 노래하듯이 경쾌하게 지저귀었다. 이 모든 풍경에 잔잔한 파도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봄이구나, 그냥 웃음이 났다.

3코스 갈바람통전망대 가기 전에 있는 동백숲. 바닥에 빨간 동백꽃이 가득했다.
함구미 마을 주민들은 돌담을 높이 쌓아 해풍을 막는다.

길 안내를 맡은 남면사무소 윤은택(53) 주무관을 만나 1코스 시작점인 함구미 마을로 향했다. ‘비렁’은 벼랑의 여수 사투리다. 비렁길은 섬 주민이 땔감을 주우러 다니던 길, 낚시하러 바다로 나가던 길을 되살려 조성됐다. 최대한 인공물을 사용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길을 냈다고 했는데, 웬걸 1코스 초입은 시멘트 바닥이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윤 주무관이 “새마을운동 때 주민들이 직접 바다에서 자갈을 주워 만든 길”이라며 “이것도 역사의 한 부분으로 봐 달라”고 말했다.

높은 돌담 사이를 걷는데 폐가 한 채가 보였다. 산 중턱에서 밭을 일구고 살던 집주인이 선착장 근처에서 민박을 치면서 빈집이 됐다. 농사보다 민박이 낫기 때문이란다. 폐가 왼쪽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길이 이어졌다. 얼마나 많은 이가 밟았는지 반들반들 윤이 났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촉촉한 흙길이 이어졌다. 전날에 비까지 뿌려 길은 더욱 보드라웠다. 살갑게 엉겨 붙는 감촉이 반가워 한동안 땅만 쳐다봤다. 얼마쯤 걸었을까 정겨운 흙길이 불현듯 넓어졌고 나무에 가려 듬성듬성 보이던 바다도 시원스레 펼쳐졌다. 비렁길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미역널방에 도착했다. 미역널방은 해안가에 우뚝 솟은 절벽으로 높이가 90m에 달한다. 옛날 함구미마을 사람들은 바다에서 채취한 자연산 미역을 이 벼랑 위에 널어 말렸다. 해서 미역널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날이 좋으면 고흥 나로우주센터까지 보여요. 나로호를 발사했을 때 동네 사람들 전부 여기 모여 구경했지.”

윤 주무관이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쉽게도 이날은 해무 때문에 나로우주센터가 보이지 않았다. 미역널방부터는 정말 벼랑길이었다. 옛길은 폭이 30㎝ 정도였는데, 지금은 데크로드를 잘 닦아놔 해안절벽의 비경을 즐기며 안전하게 걸을 수 있었다.

데크로드가 끝나고 송광사 절터에 도착했다. 절터에는 작은 밭과 흑염소 우리만 있었다. 밭주인이 함구미마을 문광열(58) 이장이었다. “먹고살기 어려웠을 때 여기까지 올라와서 밭을 일궜어. 참고로 내가 우리 마을에서 둘째로 젊어.” 문 이장이 씩 웃어보였다. 매봉산 자락으로 들어간 길은 금오도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두포마을에서 끝났다.

금오도 특산품 방풍으로 만든 방풍전복칼국수와 방풍전.

충만한 봄기운에 젖어 걷는 길

아담한 두포마을에는 민박집이 유난히 많았다. 이곳까지 찾아오는 관광객이 있을까 싶어 조심스레 방이 다 차는지 물었다. 윤 주무관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없어서 못 판다”고 잘라 말했다.

비렁길이 생기고 해마다 30만 명이 금오도를 찾는다. 금오도 주민들은 지난해 8월 3일을 잊지 못한다. 그날 하루에만 4900여 명이 섬에 들어왔다. 섬 인구(약 1600명)의 3배가 넘는 인파가 몰려온 것이다. 숙소가 모자라 교회 예배당, 마을회관, 심지어 남면사무소 숙직실까지 관광객한테 내줬단다.

두포마을에는 방풍마을 영농조합법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었다. 500년 된 해송 아래 평상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방풍전복칼국수(8000원)를 먹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호사였다. 정오를 넘기자 햇볕이 더 강해져 언덕을 조금만 올라도 등에 땀이 흘렀다. 완연한 봄이었다. 미동도 없는 바다 위로 찬란한 햇살만 부서졌다.

금오도에는 비자나무·동백나무 등 수목이 울창하다.

길은 벼랑에서 숲으로 이어졌다. 잣나무·소사나무·유자나무·동백나무·비자나무 등 다양한 수목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옛사람은 금오도를 ‘거무섬’이라고 불렀다. 산림이 워낙 우거져 멀리서 보면 온통 검단다. 이유가 있다. 1884년까지 이 섬에는 민간인이 살 수 없었다. 조선왕조가 ‘봉산(封山)’으로 지정해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서 나는 나무는 전부 한양으로 옮겨져 왕의 관(棺)을 만드는 데 쓰였다. 빽빽한 나무는 기어이 바다를 가렸다. 민가 세 채가 모여 있는 굴등마을을 지나 2코스 종점 직포마을에 닿았다.

금오도에서 비렁길만큼 유명한 게 있다. 방풍이다. 전국에 유통되는 방풍의 95%가 금오도에서 난다. 방풍은 미나리과 식물로 보통 된장에 무쳐 먹는다. 방풍이 풍을 예방하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요즘 들어 제법 유명해졌다. 방풍은 원래 바위틈에서 자라는 야생식물이었는데 지금은 밭에서 재배한다. 3~4월에 채취한 게 가장 맛있단다. 직포마을에 들어서니 온통 방풍밭이었다. 금오도에서 맨 처음 방풍 농사를 시작한 마을다운 풍경이었다.

“직포마을로 시집가면 고쟁이 하나 더 해준다는 말이 있어요.”

윤 주무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과 바다에서 맞바람이 불었다. 고쟁이 하나 더 껴입어야 할 정도로 바람이 센 마을이라더니,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봄바람도 기세가 달랐다.

3코스에 있는 매봉전망대

깎아지른 절벽이 마주하고 있는 갈바람통을 지나 울창한 동백숲을 걸었다. 짙푸른 초록 잎이 다닥다닥 붙어 하늘을 가렸다. 길바닥에 떨어진 동백을 피하느라고 발걸음이 어긋났다. 동백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덧 매봉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오도는 또 달랐다. 오목하게 들어간 해안마다 작은 마을이 자리했다. 3코스 종착점인 학동마을 뒤로 심포마을이 아스라이 보였고, 바다에는 안도와 소리도가 둥둥 떠 있었다. 언제 밀려왔는지 해무가 끼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는 더 짙어졌다. 매봉전망대에서 내려와 학동마을로 가는 내내 “섬 날씨는 아무도 모른다”는 민박집 할머니의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금오도 비렁길에는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잘 설치돼 있어 길 찾기가 어렵지 않다.

길 정보=금오도 비렁길(ystour.kr)은 모두 5코스(18.5㎞)로 금오도 서쪽 해안가를 따라서 이어진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옛길을 토대로 조성해 곳곳에서 금오도 주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걸음을 재촉하면 하루 안에 전부 둘러볼 수 있지만 여유롭게 자연을 만끽하며 걷자면 1박2일이 적당하다. 마을마다 민박집이 있다. 2인1실 5만원. 남면사무소 근처 명가모텔식당은 방풍나물이 밑반찬으로 나오는 백반이 7000원이다. 금오도로 들어가는 배편은 여수연안 여객선터미널, 돌산 신기항, 백야도 선착장에서 출발한다. 이 중에서 돌산 신기항~금오도 여천 구간에 배편이 가장 많다. 하루 일곱 번 왕복 운항한다. 돌산 신기항에서 오전 7시45분 첫 배가 뜨고, 금오도 여천항에서 마지막 배가 오후 5시30분 출항한다. 편도 기준 어른 5000원, 승용차 1만3000원(운전자 별도). 여수시청 관광과 관광진흥팀(061-659-3862).

글=홍지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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