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성당 윤호병 형을 애도하여|구용서<전 한은 총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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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성당 선생.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백아가 재현한 듯 표표한 모습으로 거문고를 타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선생은 이미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27년 여름 조선은행 동경지점에서 서울로 발령 받고 당시 동일은행에 계시던 선생을 처음 뵈인 것이 이미 반세기전. 회자정리라, 언젠가는 이런 별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었습니다만 당하고 보니 차마 붓마저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선생은 일제하에 금융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몇 명 안 되는 조선인들의 우두머리로서, 항상 자애로운 보살핌을 아끼지 않았으며, 해방 후 거의 맨바닥에서 금융계를 재건할 때는 군정재무부장의 직함을 잊으신 채 후배들을 찾아다니느라 땀 씻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금융 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금도를 가졌기에 상해임정과의 교류가 끊이지 않았지만 백범이나 해공이 무엇인가 보상을 하고자 했을 때 선생은 굳이 이를 사양했습니다.
어쩌다 불초한 후진들이 다툼이라도 벌이면 나랏일을 내세워 준열히 꾸짖었었지만, 항시 지행이 합일하는 선생의 말씀이었기에 모두 그 말씀에 따랐던 것입니다.
4개 은행의 행장 직을 역임했으면서도 만년에는 그 흔한 자가용 한대 갖지 못했던 청렴과, 그와 같은 지족상락의 인생관이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던 고고함을 이제금서야 다시 생각하며 기리게 됩니다.
성당 선생.
결백한 성품에도 모나지 않았던 생활이며, 어느 좌석에서도 훈훈함을 느끼게 해주던 두터운 인정미를 이제는 다시 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풍류와 안빈악도와 선비의 자세로 생애를 일관한 선생의 풍모는, 살아 숨쉬는 우리 모두에게 길이 거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그토록 걱정하던 금융계의 후진들도 선생의 그와 같은 일생을 귀감으로 삼을 것입니다.
이모든 다짐과 기원을 오열로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어 성당선생 ?전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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