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 40여년…김현승 시인의 생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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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1일 저녁 62세를 일기로 별세한 중진시인 김현승씨는 기독교적인 바탕 위에선 인간으로서의 고독의 세계를 추구해온 외로운 시인이었다. 40년 동안 그가 우리시단에 던져 온 찬연한 빛은 한국시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였다.
1913년 평양에서 출생한 김씨는 목사였던 부친을 따라 제주도·광주 등지를 전전하다가 32년 평양 숭실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34년 교지에 발표했던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등 2편의 시가 양주동씨의 눈에 띄어 동아일보에 발표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한 그는 식민지 상황하에서의 민족적 「로맨티시즘」이나 민족적 「센티멘틀리즘」의 시풍을 보이면서 자기 나름의 독특한 시 세계를 형성했다.
해방 후 숭실중학 교감으로 취임하면서 적극적인 시작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김씨는 이 무렵부터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외계로부터 내면의 세계로 전환하여 짙은 기독교정신을 깔기 시작했다. 60년 이후 숭전대학교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해온 그는 문협 시 분과위원장(65년) 문협 부 이사장(70년∼73년) 「크리스천」 문학가협회 회장 등 문단의 지도자적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옹호자의 노래』(63년) 『견고한 고독』(68년) 『절대고독』(70년) 등 여러 권의 시집을 펴냈다.
융통성이 없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깐깐한 성격의 김씨는 매사에 타협하지 않아 주위를 당황케 하곤 했었다. 3년 전 과로로 쓰러져 두 달 동안 병석에 있다가 다시 거뜬히 일어나 젊은 사람 못지 않은 정력적인 활동을 보여왔던 그는 임종 직전까지 『시를 써야지』를 되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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