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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요즘 기업 화두는 … 소재를 개발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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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삼성그룹의 미래기술 싱크탱크인 삼성종합기술원은 요즘 전에 없이 어수선하다. 종기원은 6월까지 용인시 기흥을 떠나 경기도 수원의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맞은편 전자소재연구단지로 이전한다. 1987년 설립된 종기원은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삼성그룹의 신화를 이끌어온 대표적 연구조직이다. 삼성 관계자는 27일 “종기원 연구인력 상당수는 수원에서 다른 계열사 인력과 함께 소재연구에 주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이 소재 산업에 그룹의 미래를 걸고 승부수를 던질 태세다. 전자소재연구단지는 지난해 11월 문을 열었다. 이미 소재 분야에만 삼성전자와 삼성SDI·제일모직·삼성정밀화학 등 주요 계열사들에서 차출된 연구원 3000여 명이 투입됐다. 미국의 듀폰, 일본의 도레이 같은 글로벌 소재기업이 삼성이 꿈꾸는 ‘미래’다. 소재 분야는 진입 장벽은 높지만 원천기술을 확보하면 세계시장을 수십 년간 지배할 수 있다. 삼성 관계자는 “소재의 경쟁력이 올라가면 부품과 세트의 경쟁력도 같이 올라간다”고 말했다.

 최근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숨가쁜 사업조정·이관·합작도 소재 분야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삼성그룹의 모태 기업 제일모직의 경우 지난해 12월 패션사업을 에버랜드에 양도하고 소재 전문기업으로 변신했다. 삼성디스플레이가 세계적 소재기업 코닝사의 최대주주가 된 것 역시 유리기판 소재 등의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삼성석유화학도 지난해 6월 독일 SGL그룹과 합작법인을 설립해 탄소섬유와 복합소재 사업에 진출했다.

 삼성이 이처럼 소재 산업에 전력투구하는 이유는 반도체·TV·스마트폰 등 그간 주력으로 삼아온 업종의 비즈니스 사이클이 상대적으로 너무 짧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액정화면(LCD)의 핵심 소재인 필름, 반도체 원료인 실리콘웨이퍼 등은 일본산이 독차지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한국은 매년 소재와 부품 무역에서 일본에 200억 달러 이상의 적자를 보고 있다. 완제품 분야에서는 화웨이와 레노버·ZTE 등 기술력과 내수시장을 갖춘 중국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맹추격해 오고 있다.

 삼성전자가 분기당 10조원 안팎의 천문학적인 이익을 내는데도 올 들어 그룹 차원에서 긴축모드에 돌입하는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한 것도 이런 고민이 깔려 있다. 삼성 관계자는 “완제품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지만 소재 분야에서 일본 등 해외기업에 의존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중장기적으로 중국 등에 대한 경쟁력 우위를 이어갈 수 없다”며 “그룹의 사활을 걸고 소재 분야 투자에 나서는 이유”라고 말했다.

 LG의 변신 노력은 더욱 처절하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실기하면서 불과 2~3년 새 글로벌 무대에서 ‘조역’으로 밀려난 위기감이 어느 때보다 크기 때문이다. LG 역시 부품·소재 기업으로의 변신에 그룹의 운명을 걸 작정이다. 특히 주력사인 LG전자를 중심으로 전기차·스마트카 시장에 ‘올인’할 계획을 짜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7월 인천청라지구에 자동차부품 연구개발 핵심기지인 ‘LG전자 인천캠퍼스’를 세워 각종 차량용 핵심 부품과 친환경 기술 개발에 나서고 있다. 그룹 최고경영진도 ‘이번 변신에 실패하면 끝’이란 각오를 밝히고 있다.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은 지난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전시회(CES)에서 “자동차가 스마트화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현실에 맞춰 전장 부품 분야에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며 부품 분야 육성을 강조했다.

 소재 계열사인 LG화학은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부문에 이어 3차원 편광필름과 고흡수성 수지(SAP) 등 첨단 신소재를 중심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하고 있다. LG는 특히 올해 중반 착공하는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마곡LG사이언스파크’에 그룹 역량을 집결시킬 예정이다. 이곳에서 LG는 부품과 소재를 중심으로 미래 원천기술 확보에 나선다. LG그룹은 마곡산업단지에 2020년까지 3조원 이상을 투자해, 12개 계열사 2만여 명의 연구개발(R&D) 인력을 모을 계획이다.

 현대자동차도 소재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업계와 경쟁을 벌이는 것 중 대표적인 게 차량의 경량화와 연비절감이다. 고장력 강판을 사용하면 연비를 줄이면서도 강도는 더 높일 수 있다. 현대차가 계열사인 현대제철을 통해 소재 개발에 나서는 이유다. 세계적인 자동차업체 가운데 대형 제철소를 계열사로 두고 특수 강판을 개발하는 곳은 현대차가 유일하다. 후발업체까지 포함해도 인도 타타자동차가 제철 계열사를 두고 있을 뿐이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지난해 11월 현대제철 당진제철소를 찾아 “강판 품질이 곧 자동차의 품질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현대차와 LG는 전기자동차를 비롯한 차세대 자동차 개발에도 손을 잡았다. LG그룹은 이날 LG화학·LG전자·LG디스플레이 등 자동차 부품 사업을 하고 있는 6개 계열사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현대차 남양연구소에서 ‘테크쇼’를 진행했다. 테크쇼는 부품업체가 완성차 업체를 대상으로 차세대 기술을 전시하는 자리다. LG가 그룹 차원에서 이 행사를 개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현대차가 국내 특정 그룹과 테크쇼를 진행한 것도 처음이다. 현대차와 LG는 200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 분야에서 협력관계를 이어왔다. 두 회사는 2004년 차량용 텔레매틱스(무선 인터넷 서비스) 기술을 공동 개발했으며, 2008년 아반떼 하이브리드 차량에는 LG화학이 배터리를 공급했다.

 효성도 소재 부문에서 변방에서 주류로 진입하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짜고 있다. 최근엔 가시적인 성과도 거뒀다. 지난해 11월 세계 최초로 고성능 신소재인 폴리케톤 개발에 성공했다. 또 철의 10배 강도를 가진 탄소섬유도 자체 기술로 개발해 지난해 5월 전주에 공장을 건립하고 상용화에 들어갔다. 탄소섬유는 가볍고 열에 강한 장점 때문에 항공우주와 자동차·군수제품·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탄소섬유는 2025년에 자동차 시장(1000조원)에 버금가는 큰 시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산업연구원의 오영석 연구위원은 “부품·소재 산업은 원천기술을 확보하기까지 긴 시간과 많은 투자가 필요해 진입 장벽이 높다”며 “한국 기업들도 이제는 장기 전략을 갖고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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