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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길서 만났네, 수원의 인사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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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공방 ‘수수한’ 대표 양혜민(40)씨가 자신이 만든 미니어처 포장마차를 보고 있다. 수원 화성 행궁과 팔달문을 잇는 길엔 이런 독특한 공방 30여 곳이 늘어서 있다.

일요일인 지난 23일 경기도 수원시 화성 팔달문 근처(화성행궁길)에 위치한 체험공방 ‘수수한’. 어머니와 함께 온 여인혜(11)양이 약 30분에 걸쳐 만든 작품을 들어보였다. 달걀에 파까지 얹힌 ‘미니어처 떡볶이’였다. 그릇 크기는 100원짜리 동전 정도이고, 떡볶이 가락은 이어폰 줄보다 가늘었다. 7000원을 내고 공방 양혜민(40·여) 대표에게 배워가며 ‘수지점토’를 사용해 제작했다. 어머니 엄금옥(50·서울 암사동)씨는 “딸이 미니어처 만들기를 좋아해 수소문 끝에 찾아왔다”며 “3㎜짜리 버버리 명품 가방, 손바닥 위에 올라가는 포장마차 등 아기자기한 미니어처를 구경하는 재미도 만끽했다”고 말했다.

 조금 떨어진 ‘나무아저씨’ 공방. ‘딱, 딱, 딱’ 하는 소리가 행인들의 발길을 잡는다. 대표 박영환(54)씨가 망치로 조각칼을 때리며 글씨를 새기고 있다. 각기 글자체가 다른 한자 ‘福(복)’자 100개, ‘百福(백복)’을 새기는 중이다. 복이 넘쳐 들어오는 것을 기원하는 작품이다. 구경꾼 사이에 “이게 전부 ‘복’자냐”라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 박 대표는 “명언이나 사자성어 조각품을 찾는 50~60대 주부들이 주 고객”이라고 전했다.

 셔터가 굳게 내려진 점포들이 즐비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던 수원시 화성 팔달문 행궁 사이 화성행궁길이 공방거리로 바뀌고 있다. 아마추어 작가들이 공방을 잇따라 열면서 예술·문화 체험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 ‘아마추어’라지만 취미에 빠져서는 직업을 버리고 공방을 열어 작품 활동에 전념하는 ‘준전문’ 작가다.

 팔달문 주변은 1970~80년대만 해도 수원의 중심가였다. 주요 상권이자 젊은이들이 모이는, 서울 명동 같은 거리였다.

그러나 이곳은 90년대 들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영통지구 같은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면서다. 한때 200여 개에 이르렀던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2010년께 이르러서는 50여 점포만 운영을 했고, 나머지 150여 곳은 빈 채 방치됐다.

 그러던 곳에 2011년 변화가 시작됐다. 아마추어 작가들이 하나둘 공방을 냈다. 조용해 작업에 전념할 수 있는 데다 임대료가 쌌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찾지 않는 거리’였기에 작가들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공방이 늘자 이번엔 수원시와 수원문화재단이 나섰다. 슬럼화되던 팔달문 주변을 ‘문화·예술의 거리’로 가꿔보기로 했다. 아스팔트 도로를 블록 길로 바꿔 운치를 더하고 인도 폭을 넓혔다. 곳곳에는 벽화를 그려넣었다. 그게 2012년의 일이었다. 인근 주민들도 힘을 보탰다. 돈을 모아 ‘작품 가로등’을 세웠다. 죽은 나무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전력 소모가 적은 LED 램프를 설치한 가로등이다.

 지금 이곳엔 가죽·칠보·한지공예 등을 체험하고 작품을 살 수 있는 각종 공방 30여 곳이 들어섰다. 공방 작가들과 주민들은 때때로 소규모 지역 축제를 열어 볼거리와 놀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면서 방문객이 늘었다. 주말이면 공방 한 곳에 30~50명이 들른다. 가죽공방 ‘스위트아트’의 정선화(40) 대표는 “2011년 여기에 공방을 낼 때 만해도 ‘죽은 거리’라 불리던 이 일대에 이젠 생기가 돌고 있다”고 말했다.

 수원문화재단 라수흥 대표는 “우선 공연 관람과 예술 체험을 할 수 있는 야외 시설(한마당)을 꾸밀 계획”이라며 “이 지역을 서울 인사동과 같은 관광 명물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글·사진=임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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