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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그 입지의 현장을 가다|반공포로출신 재인 실업인 지기철씨(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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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뉴델리=김동수 특파원】「유엔」군의 인천 상 륙 작전을 이틀 앞둔 50년 9월16일 장계 리에 대대본부를 둔「지 소좌」에게 작전명령이 전달된다. 이튿날 철수하라는 명령이다.「지 소좌」는 이 기회를 틈타 탈출해야겠다고 작정했다.
처음에는 1개 대대를 몽땅 인솔하고 귀순할 생각이었다. 만주에서부터 생사를 같이 해 온 정으로 부하들의 반발은 거세지 않을 거라 여겼다. 이튿날인 17일 철수준비인 양 장비를 집결시켰다. 수색대를 내보낸다, 장비를 점검한다, 부산떨며 시간을 끌었다. 해거름이 지도록 늑장부릴 심산이다. 연대본부와의 연락도 두절. 정오를 넘어서자 연대본부의 정치보위부 장교 여러 명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1개 대대 이끌고 귀순작정>
『왜 연락이 없느냐』『당장 가자』는 성화다. 일은 글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낮에 철수하다가 미군기의 공격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고 둘러댔다. 저물녘까지는 부대를 못 움직이겠다고 버티며 보위부장교들을 간신히 돌려보냈다.
더 이상 머뭇거릴 겨를이 없다. 혼자라도 빠져나가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부하들에게 부락에 잠깐 다녀오마 이르고 한낮에 대대본부를 등졌다. 마을서 두루마기와 갓을 얻어 군복 위에 걸쳤다.
몸에 지닌 물건은 권총과 작전지도. 후미진 목마다 깔린 초병들에게는 정찰 좀 하고 오겠다 말하며 「유엔」군 진지로 접근해 갔다.
30여분만에 흑인 초병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30분은 시간이 아니라 세월이었던가…. 등허리에 후줄근하게 배어든 식은땀이 척척하다.
흑인 초병은 그의 몸을 더듬어 시계와 돈을 뺏더니 미군 장교에게 데리고 갔다. 얼떨떨했다. 권총은 그대로 두고 금품을 뺏다니. 지씨는 지금도 당시 흑인 병사의 소행을 불쾌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통역을 통해 미군 대위의 간단한 심문을 거친 다음 진주를 거쳐 부산의 국군정보부대에 넘겨졌다. 북괴군 복장 그대로다. 『너 이놈의 자식, 깃발 날렸구나.』어느 헌병 사병이 다짜고짜 볼때기를 쥐어박는다.
스스로 부하에게 손찌검 해 본 일 없던 처지라 귀순이 잘못됐나 싶어 불안했다. 장교를 불러 달라고 청하여 하소연, 다음부터는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이 시작됐다. 미군 관리라 그런지 기대했던 것처럼 귀순포로라고 별나게 대우해 주지 않아 서운했다.
귀순한 사람 나오라는 소리에 장교만 8백∼9백 명 나서는 판이니 그럴 법도 했다.
서너 달 지나니 수용소가 뒤숭숭해진다. 공산세포조직이 뿌리를 넓혀 가며 반공포로에 대한 납치, 잔학한 살인사건이 잇달았다. 지씨를 비롯한 반공포로들은 좌우익을 나누어 수용해 달라고 미군에게 요청했으나 막무가내다.

<친 공포로의 폭동계획 제보>
반공포로의 앞장에서 활약했던 지씨는 친 공포로가 급히「처치」해야 할 인물로 지목되고 있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지씨는 친 공 포로들이 수용소 밖으로 땅굴을 파고 나가 폭동을 일으켜 거제도를 점령하려던 계획을 탐지한 것을 계기로 미군에 제보해 주면서 자신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은 그를 병약자를 위한 보호자 수용소로 보낼 따름이었다. 살벌하기는 덜했으나 신변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미군과의 통역을 맡고 있던 이규현씨(현 문공부차관)에게 통사정했더니 자신도마찬가지 신세라며 스스로 힘을 합쳐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고 달래 준다.
53년 반공포로 석방 때 지씨가 있던 보호수용소에는 연락이 늦어져 뒤늦게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 했다. 다음날 미군 경비병들이 교대하는 틈을 타 집단탈출에 성공, 민가를 찾아가 옷을 갈아입은 뒤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었다. 미군들이 수색에 나섰기 때문이다.
『헬로·메이저(여보 슈, 소령 님)』이불자락을 들치고 히죽 웃는 미군 헌병의 낯익은 얼굴이 그토록 밉살스러울 수가 있을까. 보호수용소에서 탈출했던 반공포로들은, 거의 전부 붙잡혔다. 지씨는 탈출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영창신세를 지게 된다.

<몇 차례 탈출시도 끝에 풀려나>
영창에 웅크린 동안 지씨는 또 한번 탈출을 시도한다. 구두밑창에 박힌 쇠붙이를 떼어 내 탈출에 사용할 연장을 만드는 중에 풀려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곡절을 겪는 동안 지씨는 정신적으로 커다란 고비를 겪는다. 소박한 동기에서 생존의 방편으로 삼았던 종교의 참 뜻을 어렴풋이 깨치는 과정에 들어선 것이다.
그는 포로관리당국이 진심을 알아주는 것 같지 않아 안타까웠다. 무언가 자신의 반공활동에 신빙성을 줄 만한 계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다수 반공포로들도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이 신빙성의 증거로서 종교를 택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얄팍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생사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지씨도 오랜 삶은 아니지만 숱한 전장에서 갖은 고초를 치르면서도 이때처럼 생존이라는 문제를 두고 회의해 본 적도 없던 터다. 심리적으로 허전함을 느끼며 뭔가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절절하던 때다. 이런 생각에서「카톨릭」을 택했다. 이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뒷날 그가 인도에서 자립하는데 정신적·물질적으로 결정적인 바탕으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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