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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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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의적이라면 서양사람들은 제일먼저「로빈·후드」를 연상한다. 우리는 홍길동을 생각한다.
둘 다 가공의 인물이다. 둘의 시대배경은 다 난세였다. 주먹이 곧 법이요, 악이 판치고 선이 움츠리고 있던 시대였다. 그러니까 주먹엔 주먹으로 맞서며, 약자의 서러움과 원한을 풀어주는 영웅을 기다리던 서민의 꿈이 의적을 만들어냈다고 나 할까.
어느 나라에서나 의적이 중세에 많이 나왔다는 것도 이런 때문이다. 근대 이후에 이르러 의적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서양에서는「아르센·뤼망」이 꼽힐 정도다.
그러나「뤼팡」은「로빈·후드」와는 엄청나게 다르다.「후드」는 집단적으로 일했다.「뤼팡」은 언제나 혼자 일했다.
「후드」는 강도질도 서슴지 않았다. 늘 칼과 활을 들고 다녔다.「뤼팡」은 칼 대신 지략을 쓰는 도적이었다.
「후드」는 언제나 권선징악적이었다. 그리고 서민을 괴롭히는 오이들이 표적이었다. 홍길동이며 일지매도 마찬가지다.
「뤼팡」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권선징악적인 면은 전혀 없었다. 그가 아니라도 법이 오리들을 다스려주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활양식도 판이하게 달랐다.「후드」는 산 속에 숨어살았다. 그러나「뤼팡」은 백만장자처럼 우아한 생활을 즐기는 신사였다.
시대가 의적의 성격을 이렇게도 다르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뤼팡」을 만들어낸 소설가「모리스·르블랑」이나「뤼팡」의「팬」들이나 사실은「뤼팡」의 적선에는 흥미가 없었다. 남의 보물을 엄중한 경??망을 뚫고 교묘하게 훔쳐내는「뤼팡」의 솜씨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그런「뤼팡」도 이제는 없다.
세상이 그만큼 멋이 없어졌다고 할까. 아니면 의적의 시대는 완전히 끝났다고 할까.
최근에 일지매를 자처해오던 2인조 강도단이 잡혔다. 일지매는 옛사람들이 꾸며낸 의협 적인 도적이었다. 그는 정과 풍류에 넘친 쾌 한이었다. 물론 칼도 잘 썼지만 피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철저한 서민들의 영웅 감이었던 것이다.
최근 안양에서 잡힌 현대판 일지매는 그렇지가 않았다. 하기야 남의 집에서 턴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는 했다. 그러나 나눠준 돈 이상을 자기네가 쓴 모양이다.
그러니까 참다운 의도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의 솜씨도 매우 잔인했다. 그들은 표적에도 차별이 없었다. 더욱「의적」의「이미지」에서 멀어지는 얘기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한 의적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수단과 목적과를 자칫 혼동하는 오늘의 사회풍조 탓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의적이 나올 수 있는 바탕을 오늘이 어느 때 보다도 많이 안고 있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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