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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호수·골프장·동물원 … 도망간 대통령 호화 관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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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세 달간 유혈충돌을 거듭해 온 우크라이나 사태가 야권으로 정국의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급변하고 있다.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낸 ‘피의 목요일’ 이후 정부·야당이 조기 대선과 헌법 개정에 극적으로 합의한 지 하루 만이다.

 22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최고의회는 인권침해와 직무 유기에 대한 책임을 물어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퇴진을 가결했다. 여당 의원은 불참한 채 참석 의원 380명 전원이 찬성했다. 또 의회는 5월 25일을 대선일로 정했다. 이날 결의에 따라 우크라이나 야당 지도자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도 석방됐다. 그는 2010년 대선에 출마해 야누코비치 대통령에게 패한 뒤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총리 재임 당시 러시아와의 천연가스 거래 과정에서 횡령했다는 혐의였다. 유럽연합(EU)은 그를 정치범으로 여기고, EU와 우크라이나의 협상 과정에서 티모셴코의 석방을 요구했었다.

 티모셴코 전 총리는 이날 석방 직후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히고 키예프 독립광장으로 가 시위대 앞에 섰다. 허리 통증으로 휠체어를 타고 등장한 그는 “오늘 우크라이나는 끔찍한 독재자, 야누코비치를 끝내버렸다”며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말라”고 시위대에 당부했다.

 정부와 야당이 타협에 합의한 21일 저녁 키예프를 떠나 하리코프로 피신한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이날 방송에 나와 의회 결정을 비난했다. 하리코프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동부의 국경 도시다. 그는 러시아어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전 세계가 목격하고 있는 이 상황은 훌리건이 벌이는 쿠데타”라며 “대통령에서 물러날 생각도, 우크라이나를 떠날 생각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러시아로 탈출을 시도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급변한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서방과 러시아의 반응은 엇갈린다. 미국 백악관은 티모셴코 전 총리의 석방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우크라이나의 미래는 그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불법적인 극단주의자들이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키예프를 점령했다”고 비난했다.

 EU와 러시아 사이의 노선 갈등으로 촉발된 우크라이나 사태는 극적인 전개로 분수령을 맞았지만 전망은 어둡다. 친러시아-친유럽으로 갈린 지역 갈등과 경제 위기 탓이다.

 한편 반정부 시위대는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떠난 뒤 그의 비밀 관저를 점거해 공개했다. 호화로운 관저의 내부는 지금까지 철저히 봉쇄돼 우크라이나 고위층의 부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키예프에서 20㎞ 떨어진 근교에 있는 관저는 넓이 1.4㎢(여의도 면적의 절반)에 이른다. 드높은 울타리 안에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동상이 드문드문 서있는 정원에는 분수가 솟는 연못에 야생 오리들이 있었다. 동물원과 18홀 짜리 골프장, 헬기 이착륙장은 물론, 수십 대의 초고가 클래식 자동차가 주차된 차고가 있는 초호화 저택이다. 인공호수에는 15세기 대항해 시대에 쓰인 대형 범선이 떠있었다. 이 관저에는 거대한 목조의 영빈관이 있었으나 이 건물은 아무도 입장하지 못한 채 창문을 통해 대리석 바닥과 수정 샹들리에와 금으로 도금된 난간의 계단 등을 볼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언론은 부정 축재로 악명 높았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이 저택을 짓는 데 약 1억 달러(약 1170억원)를 들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날 처음으로 이 호화 저택을 본 시민들은 역겨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이를 구경하는 것 자체가 수십 명의 희생자를 낸 반정부 시위대의 승리라고 말했다.

홍주희 기자

사진 설명

22일(현지시간) 일반인에게 공개된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초호화 관저 내부.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값비싼 대리석이 깔려 있다. 저택 전경, 관저 내부의 골프장, 관저 내 인공호수에 떠 있는 대형 범선. 범선은 식당 겸 카페로 이용됐다. [키예프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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