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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 『중앙 문예』 당선 희곡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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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나오는 사람들
갑남
을남
아이
▲때 한낮
▲곳 조그만 섬
▲무대 중앙에, 낡은 미끄럼틀이 한쪽으로 쓰러질 것 같은 기우뚱한 상태로 자리 잡고 있다. 위 부분의 난간이 하나도 없으며 한쪽 미끄럼대는 제거되고 없다. 무대 오른쪽 공간에 종 하나가 덩그렇게 매달려 있다. 이상으로 무대는 학교 운동장의 한 부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하면 된다.
막이 오르면 아이가 미끄럼틀 위에 올라앉아 몸을 흔들거리고 있다. 따라서 미끄럼틀이 예리한 금속성의 마찰음을 내며 기우뚱기우뚱 흔들거린다. 아이는 차츰 재미를 느끼는 듯 열심히 몸을 흔들어 댄다. 그러면서 눈은 멀리, 아득히 먼바다를 쳐다보는 듯 무대 밖으로 향하고 있다. 점점 더 세차게 몸을 흔들거린다. 그럴수록 미끄럼틀은 위험한 요동을 되풀이하며 폐부를 찌르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일정한 가락의 반복으로 퍼져나간다. 갑남, 검은 가방을 들고 왼쪽에서 나타난다.
갑남 (위엄 있게) 애! 그러다가 미끄럼틀이라도 넘어지면 어쩔려고 그 위에서 마구 흔들어대느냐?
아이 (개의치 않고)
갑남 빨리 내려와!
아이 (흘끗 돌아보곤 여전히)
갑남 요 맹랑한 녀석 봐. (미끄럼틀의 받침대를 꽉 붙들어 잡고)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지고 싶으냐?
아이 (싱긋 웃으며) 아저씨도 올라오세요. 재미있어요.
갑남 뭐?
아이 재미있다구요. 올라오세요.
갑남 (어이가 없어 멍청히)….
아이 올라오시라니까요!
갑남 다친다니까!
아이 염려 없어요. 아저씬 무척 겁이 많으시나봐….
갑남 이놈아! 미끄럼틀에선 미끄럼을 타는게지 누가 흔들어 대라더냐?
아이 아저씨두! 저게 안보여요? 미끄럼을 타다간 저기 중간에서 발이라도 빠지면 더 큰일나요.
갑남 그럼… 그 위엔 올라가지 않는 거야!
아이 (다시 흔들거리며) 이렇게 흔들고 있음 미끄럼 타는 것보다 더 재미있어요. 마치 이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거든요.
갑남 세상이 흔들려?
아이 아저씨 얼굴도 흔들리구요.
갑남 (차츰 이끌리며) 그렇게도 재미있니?
아이 아저씨가 흔들면 더 재미있을 거예요. 어서 올라 오세오.
갑남 헛, 그놈 참….
아이 어른들은 모두 겁쟁이에요. 우리가 올라오기만 하면 내려오라고 막 야단을 치시고‥. 아저씨도 매우 겁쟁이시군요.
갑남 그렇게 보이니? (하며 한 계단 올라선다)
아이 어서 올라오세요!
갑남,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다. 한발한발 올려놓을 때마다 미끄럼틀이 진동한다. 갑남의 동작이 더욱 조심스러워지고, 반면 아이는 그러한 갑남을 보고 조소를 머금는다.
아이 호호, 아저씨두! 괜찮아요!
갑남 (겨우 미끄럼틀 위에 올라앉는다.)
아이 아저씬, 괜히 겁을 내고 야단이셔!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보다 겁이 더 많은가봐요. 이 미끄럼틀 위에 올라오는 어른이라곤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렇죠, 아저씨?
갑남 너도 어른이 되면 아무렇지도 않은 것에 겁을 집어먹게 될 거야.
아이 왜 그렇죠?
갑남 글쎄, 나도 모르겠다….
아이 글쎄라…?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
갑남 사방을 둘러본다.
아이 아저씨, 좋죠?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여기가 이 섬에선 제일 높은 곳이에요.
갑남 그러고 보니까 내가 꼭대기에 올라왔구나.
아이 여기서 내려다보면 저 아래 물 속의 고기들이 다 보여요.
갑남 (무대 밖을 내다보며) …?
아이 보이죠?
갑남 안 보이는데…. 이놈이 날 놀리는구나!
아이 아녜요!
갑남 여기서 저 아래 물 속의 고기가 어떻게 보인다는 거냐?
아이 전 보인단 말예요!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환히 보여요!
갑남 정말이냐?
아이 아저씰 놀리는게 아녜요!
갑남 그런데 난 왜 안 보일까?
아이 곧 보게 될 거예요. 아저씬 오늘 처음 이 섬에 왔잖아요?
갑남 그래서 안 보인다는 거냐?
아이 아마 그럴지도 몰라요. 저도 처음엔 안 보였으니까요.
갑남 그래?
아이 이젠 그 물고기들의 속삭이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는 걸요.
갑남 (바짝 흥미를 느끼며) 속삭이는 소리까지도?
아이 물고기들이 노는 모양을 한참 쳐다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귓가에 와서 맴돌아요.
갑남 (아이의 팔을 붙잡으며) 틀림없이 들리냐?
아이 거짓말 아녜요!
갑남 (혼자 소리로) 물고기들이 속삭이는 소리라...?
아이가 벌떡 일어나 얼른 계단을 내려온다. 미끄럼틀이 한바탕 진동을 한다. 갑남, 눈이 휘둥그레져 아이를 내려다본다.
갑남 이놈아! 사람 간 떨어지겠다! 왜 내려가지?
아이 질서를 지켜야죠.
갑남 질서?
아이 그래서 아저씨한테 양보하는 거예요.
갑남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아이 그 위엔 언제든지 한 사람만 올라가 있게 약속이 돼 있거든요!
갑남 약속도 희한한 약속이 다 있구나.
아이 (미끄럼틀 위 받침대를 잡고 흔들며) 아저씨, 흔들어 드릴까요? 재미있어요.
갑남 (놀라) 아, 아니다! 그런데 저… 정말 물고기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냐?
아이 예! 들려요! 그렇게 앉아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틀림없이 들릴거예요.
갑남 언제쯤? 오늘은 듣게 되겠지?
아이 오늘…?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아마 내일쯤….
갑남 (실망) 내일? 그렇게 오래 걸리냐?
아이 그럼요!
갑남 그럼…, 그때까지 여기 앉아서 줄곧 지켜봐야 되겠구나?
아이 어쩌면 오늘 듣게 될지도 몰라요.
갑남 (기뻐서) 그래?
아이 아저씨 혼자 조용히 앉아 있으면 오늘이라도 들을 수 있을지 몰라요. 그래서 아저씨에게 그 자릴 양보하는 거니까요.
갑남 고맙다. 어디 보자. (하며 가방을 연다)
갑남이 가방을 열자, 여러 가지의 타악기 소리가 묘하게 조 화를이룬 명쾌한 멜러디가 터져 나온다.
갑남, 한참 가방을 뒤적이다가 조그만 장난감 나팔을 꺼내곤 가방을 닫는다.
동시에 멜러디가 뚝 멎는다.
갑남 이거 줄까?
아이 뭐예요?
갑남 (분다)
아이 (좋아서 손뼉을 치곤) 절 주시겠어요?
갑남 가래, 가져라.
아이 (나팔을 받아서 불어보곤 꾸벅 절을 하며) 아저씨, 고맙습니다. (길게 나팔을 분다. 그러다가) 아저씬, 이 섬에 뭣 하러 오셨죠?
갑남 알고 싶으냐?
아이 고기 낚으러 오셨어요?
갑남 …소리를 낚으러 왔다.
아이 소리요?
갑남 그렇단다.
아이 소리를 어떻게 낚아요?
갑남 (빙그레 웃으며) 이 귀로 낚지 어떻게 낚아?
아이 참, 이상하다! 소리를 낚는다…? 에이, 아저씨두! 소리를 낚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갑남 얘들은 몰라도 돼. 난 그 소리를 못 찾으면 죽고 만다. 꼭 그 소리를 찾아야 돼. 물고기들이 속삭이는 소리…. 그 소리를 낚아야 돼. 그 소리를 이 귀에 담기 전엔 여길 떠나지 않을 테다!
아이 (나팔을 길게 불곤) 이런 소리도 있잖아요?
갑남 그건 돌이야.
아이 소리잖아요, 돌이 아니고.
갑남 돌처럼 흔한 소리라서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 가만 생각다가 종이 매달려 있는 곳으로 뛰어간다. 줄을 잡으려고 하나 너무 높다. 팔딱 뛰어 줄을 잡아 당겼다가 놓는다. 단 한번, 짧은 여운을 남기며 울리는 종소리.
아이 (큰 소리로) 아저씨, 어때요?
갑남 (고개를 갸웃하고) 한번 더. (사이) 아니, 좀더 세게. (사이) 좀더 세게! (사이) 조금 약하게…. 좀더 세게. (사이) 좀 더 세게! (사이) 조금만 더 세게1
아이가 힘을 내어 뜀박질을 할 때마다 종소리들이 여운에 여운을 물고 번져나간다. 드디어 아이가 기진 하여 주저 앉더니 어깻숨을 쉰다.
갑남, 마음에 차지 않는 아쉬운 표정으로 아이를 쳐다본다. 문득 무대 밖을 바라보던 아이, 미끄럼틀 곁으로 다가온다.
아이 할아버지한테 가봐야 돼요. 할아버진 고기를 많이 잡아 오실 거예요. 가서 함께 들고 와야 돼오.
갑남 나중에 또 오겠니?
아이 예,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려서 고기 큰 거 한 마리 갖다 드릴께요.
갑남 빨리 다녀오더라.
아이, 왼쪽으로 나간다. 나팔을 부는 소리가 나더니 점점 멀어져간다. 가방을 여는 갑남. 예의 그 명쾌한 멜러디가 쏟아져 나온다. 여러 가지의 타악기 소리가 서로 화음을 이루며 한동안 계속되면 잠시 우울해졌던가 싶은 갑남의 표정이 밝아진다. 천천히 가방을 닫음에 따라 타악기 소리가 하나하나 꺼져 들어간다. 을남, 오른쪽에서 들어오다가 갑남을 발견하곤 얼른 가까이 온다.
을남 여보시오! 여보시오!
갑남 (놀라서 가방을 후딱 닫고) ?
을남 보아하니 점잖은 양반이 거긴 왜 올라갔소? 빨리 내려오시오!
갑남 (불쾌하나 내색을 않고) 마침 잘 오셨군. 저 종 좀 쳐주시겠소?
을남 빨리 내려오라니까!
갑남 난 저 종소리가 듣고 싶단 말요.
을남 당신은 애가 아니잖소? 빨리 내려와요!
갑남 왜 이러실까…? 부탁하는 말은 듣지 않고... (을남을 쏘아보다가) 남의 일에 훼방놓길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도 있군.
을남 말조심하시오!
갑남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을남 보면 모르오! 이 학교….
갑남 (말을 잘라) 아! 선생. (새삼 을남의 위아래를 눈여겨보곤 미심쩍은 듯) 어째, 선생 같질 않군….
을남 좋게 말할 때 내려 와요. 당신 같은 어른이 올라 앉아 있으면 이 미끄럼틀이 하루도 못 견뎌요. 무너진단 말이오. <계속>

<당선 소감>자연을 너무 외면해 왔다
야산에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풀 한 포기가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바닷가에서 해풍을 쐬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바위가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숲 속의 이름 모를 새들이 또한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들을 외면한 채 무척이나 방황했나 봅니다. 이젠 그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매우 늦었지만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보 잘 것 없는 글을 뽑아 주신 심사 위원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아울러 저를 성원해 주신 여러분께 사의를 드립니다.
▲경남 충무시 동호동 271의 3
▲34세
▲서라벌 예대 문창과 졸업
▲현재 교사

<심사평>극 주변만을 맴돌다가 얘기의 초점들 잃어|『소리』는 모호한 실체를 명징 하게 잘 극화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다음과 같다.
『혼례』 (김준일-서울), 『미행자』 (신용삼-서울), 『올가미』 (심연숙-서울), 『소리』 (강수성-경남 충무), 『똥개』 (김철진-서울). 『혼례』는 남녀 두 사람씩을 특정하게 짝을 지우지 않고서 한 장소에 모이게 하는데서 생기는 극적 흥미를 노린 점에서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시추에이션」 의존의 드라마는 주제를 파고드는데 허술하기 쉬운데 여기서도 결혼의 의미가 내면화되지 못한 것이 큰 흠이다. 같은 성질의 작품으로 『미행자』를 들 수 있는데 미행자 A, B를 한사람의 양면으로 설정한 착상은 『혼례』의 경우보다 뛰어나지만 그들이 언제나 극의 주변만을 맴도는 극 구성으로 해서 이야기의 초점이 모아지지 못한 것은 이 작품의 결정적 약점이다.
『올가미』는 약간 복잡한 한 가정의 내부를 심리적으로 추구하려던 데서 드라머의 정통성을 따르고 있으며 주제를 파고들려는 자세에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다. 이런 유의 작품은 앞의 것들과 다른 의미에서 쓰기 힘드는 것이지만 드라머는 언제나 객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작자는 명심해 두어야겠다. 심리의 미로를, 약간 풀기 어려운 극의 상황이 상승시켜놓음으로써 알듯 모를 듯한 작품이 되어버렸다.
알듯 모를 듯한 점에서는 오히려 『소리』가 더 힘들게 느껴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적이 아닌 듯한 내용을 매우 현실적인 극 구성 속에 극화시켜준 의미에서 이 작품은 꽤나 명징 하다. 여기 인물들이 추구하는 『소리』의 실체는 모호하지만 아주 단순화 (객관화)된 드라머의 상황으로 해서 오히려 여러 가지 의미로 전달된다. 이 작가는 드라머적 상상력을 어느 만큼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인다.
다만 중간 부분 갑남과 을남의 대화 부분이 장황한 것이 탈이다. 신인으로서의 역부족 탓으로 보인다.
『똥개』는 더할 나위 없이 알기 쉬운 상황 속에 더할 나위 없이 알기 쉬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이 너무나 표면화되어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설명적이라는 인상을 면키 어렵다. 한정된 분량 속에 무언가 확실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드라머의 제일 원칙이지만 그것이 간접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것도 또한 드라머의 철칙이다.
이상의 여러 점을 종합하여 당선작에 『소리』를 밀고 『똥개』를 선외 가작으로 결정했다. 이 두분 뿐 아니라 여기 언급된 모든 분에게 앞으로 계속 정진하여 좋은 극작가가 되어주기를 부탁한다. <여석기·유덕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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