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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박재삼<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이름 붙일 도리도 없는 잡다한 유파의 엄청난 대량생산 앞에서 나는 차라리 저 「앙데팡당」전의 <무감사>적인 태도를 받아들이고 싶다. 시를 쓴 작가의 본의를 존중해 주어야 하고, 또 나의 성급한 비평을 유보해 두고 싶은 이 상치가 문득 그런 생각을 일게 한다.
어떤 경향별로 공통성을 찾는다거나 하는 일이 전에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엄두를 못 낼만큼 각자가 자전적이다. 이래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적 안목으로는 어디에서 월평의 기준을 찾아야 하는지 막연해진다. 그만큼 시는 많으나 시가 없는 무정부상태를 빚고 있다.
그래서 읽히는 시, 즐거움을 주는 시정도로 어렴풋한 윤곽을 잡고 소감을 적는 정도가 고작이다.
먼저 조병화씨의 『귀국』(한국문학). 씨의 시는 소시민의 애환과 고독의식을 언제나 감상적으로 읊는 것이 그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이 시도 그 예외는 아니다. 삶의 장소를 가숙이라고 보는 씨는 나이 탓인지 그 서술의 가락이 한결 차분해지고 담백해지고 있다. 「아무리 돌아도 돌아올 곳은 한곳/네 곁/소리 없는 이 귀국/내 이 눈물은 뭔가.」많이는 <외로움>을 내세워 오던 씨가 이번에는 거의 처음인 듯<눈물>도 곁들이고 있는걸 보면 피부 적인 허전함과 함께 심정적인 아픔까지도 담는 쪽으로 약간 그 세계가 변한 듯함을 느낀다.
물론 이런 변화는 사소한 그것이지만, 나이라는 무게를 얹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가령 나이도 없이 젊은 사람의 그것 같은 격렬한 투의 어법이나 또는 상징의 수풀 일회도로 엮는 50대의 시에서 우리는 간혹 현학을 읽을 수 있지만, 조씨의 시는 그런 면에서 비교가 허락된다면 전혀 속임이 없고 구김살이 없다고 할 수가 있다. 그만큼 씨의 시는 사치스러운 외로움에서가 아니라 질박한 외로움에서 씌어지고 있으며 또 거기 나이에 어울리는 아픔까지도 순탄하게 곁들이고 있다고 하겠다.
비슷한 연배의 시인인 정한모씨의 『새벽』(월간중앙)도 읽히는 시다. 연작인 듯한 이 시에는 「어둠을 응시하는 눈」과 「영롱한 빛으로 울고 있는 가을 벌레소리」를 「매치」시켜 관념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을 잘 융화·결합시켜 보여주고 있다.
혹은 또 시각적인 사상과 청각적인 정상을 혼연하게 동일선상에 놓고 탐구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앞서 조씨의 시와 비해 본다면 논리적 결구성이 강하나 정감 면의 호소력이 약하다.
씨의 시에서는 언제나 반짝하는 강한 섬광 적인 번뜩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은은한 광택>과 같은 것을 보게 된다. 누구보다도 지속적이고 저력 적이라는 인상이었는데, 이번의 『새벽』도 그렇다고 할 수 없을까.
즐겁게 읽힌다는 점에서는 허영자씨의 「떡살」「빗」「다듬이」(심상)도 뺄 수 없다. 여성적 정한의 예쁜 뿌리를 토실토실하게 캐낸 그의 솜씨는 여기서도 여전하다.
씨의 정한의 세계는 연약하면서도 실은 <매운 맛>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떡살」에서 「땅속에 묻혀서도/썩지를 않을/저승에 가서도/지워지지 않을」한 것이라든지 「다듬이」에서 「소낙비처럼/소낙비처럼/아픈 매를 내려 주세요」한데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여성적 정한은 그것이 굴종이라는 멍에 위에서 파악되는 것이 통념이었다면 씨는 어쩌면 거기 반기를 든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더 처절하고 사무치게 그것을 작품화시키기 때문에 <매운맛>을 주는 것은 아닌지. 쉽고 즐겁게 읽히면서 다른 하나의 <매운맛>을 거느리고 있다는 이 비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조그만 의문이기도 하다.
소월의 정한도 남성적이기보다는 실상 여성적인 그것으로 풀이되어 왔는데, 그것은 다시 한번 더 섬세해지고 한번 더 매워지는 길을 허씨는 더듬고 있는 듯하다. 따지고 보면 이런 세계의 천착은 소월 이후 여류로서는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왕 거기 눌어붙었다면 소월이 놓친 대목을 눈 여겨 찾아 문채를 더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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