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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영희 칼럼

남북관계에 '봄'은 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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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올 들어 북한 국내 사정이 남북대화 재개와 협력을 필요로 하는 데로 흐르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지난주 북한을 방문해 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 김양건을 포함한 대남정책 관련 고위인사들을 만난 재미 정치학자 박한식 교수(미국 조지아대학)에 따르면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에서는 김정은 수령화 사업이 활발하다. 김정은은 작년 6월 당, 군대, 근로단체, 출판보도부문 책임일꾼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당의 유일 영도체제를 철저히 하는 데 모두가 매진하자고 촉구한 바 있다. 당 유일체제의 정상에 수령이 앉는다. 형식으로는 수령과 당과 인민의 3두체제가 국가를 이끄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수령이 절대적인 우위에 선다. 수령 중심 체제에 장애물이라고 생각된 장성택은 사라져야 했다.

 장성택 세력 제거 후 북한의 대남정책은 군부의 손에 장악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당과 내각과 군부로 일의 성격에 따라 배분이 되고 그들이 올린 정책 아이디어를 토대로 김정은 위원장이 최종적인 정책결정을 내리는 제도가 정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남정책에 관한 한 김양건의 위상이 장성택 생존 때보다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고위급회담 북한 수석대표 원동연 통전부 부부장은 김양건의 분신으로 대남정책을 실무지휘하는 실세다. 그는 작년 여름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을 대변할 청와대 인사와 베이징에서 만나자고 제의한 사람이다. 장성택의 비선(秘線) 참견을 벗은 김정은의 적극적인 대남 화해공세의 첫 결실이 이산가족 상봉 합의와 고위급회담이다.

 그러나 갈 길은 멀고 험난하다는 것이 고위급회담에서도 확인되었다. 북한은 24일 시작되는 한·미 합동 키리졸브 훈련을 20~25일의 이산가족 상봉이 끝난 뒤로 미뤄 달라, 남한 언론이 북한 존엄을 훼손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둘 다 어려운 문제다. 남한은 인도적인 문제와 군사 문제는 분리하는 입장이고 존엄 훼손 문제는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정부 권한 밖의 일이다. 이산가족 상봉이 마지막 순간에 깨어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지만 고위급회담에서 양측은 이산가족 상봉만은 예정대로 진행하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오늘 다시 만나 논의한다. 합의된 상봉 취소는 양측에 부담이다.

 믿을 데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다. 박 대통령도 신년기자회견 이후 남북 화해협력에서 더 크게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 이르기까지 ‘북방 사업’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수령 중심 유일체제가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김정은에게 가장 급한 과제는 경제를 일으키는 일이다. 남한의 지원이 절실하다. 장성택 처형으로 중국 기업들과 하던 많은 개발사업이 모두 중단되어 중국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여전히 북한에 대한 ‘전략적 무관심’ 정책에 매달려 있어 언제일지 알 수 없는 북·미 관계 개선까지 경제개발을 미룰 수도 없다. 경제 살리기는 장성택 처형의 정당성과 직결된다.

 동아시아 지역은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미국과 거기에 도전해 G2 중심의 새로운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중국의 치열한 파워게임으로 크게 유동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는 이런 미·중 파워게임에 종속변수로 밀리고 있다. 북한 비핵화도 슬그머니 긴박성을 잃고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남북한이 획기적인 발상으로 관계를 개선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현안을 해결하고 공존·공영의 협력체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 첫걸음이 이산가족 상봉 같은 감성적인 문제다.

 고위급회담이 결렬된 것으로 보는 것은 성급하다. 의제도 없이 급하게 만난 회담에서는 상대방의 양보할 수 있는 이해와 양보할 수 없는 핵심 이해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만 해도 의미 있는 성과다.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기지개를 켜고 나온다는 경칩을 눈앞에 둔 봄의 길목에서 남북관계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동아시아의 질서개편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길을 모색하는 긴 여정에 올랐다. 희미하게 들리는 한반도의 ‘봄이 오는 소리’를 확실한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대북정책 기조를 더 실용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남북한 당국자들과 국민에게는 함께 살얼음 위를 걸어 호수를 건너는 조심스러운 자세가 중요하다. 김장수·김관진·남재준의 안보 3인방이 목소리를 낮추고, 특히 국방장관은 대북 발언을 많이 자제해야 한다. 튼튼한 안보가 대북정책의 바탕이지만 외교와 남북대화가 강경한 안보 3인방에 장악될 수는 없다. 대화·외교를 대표하는 인물이 국가안보회의 제1차장으로 들어간 것을 계기로 대북정책도 안보와 대화 간의 균형을 맞춰야 성공이 보장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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