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살아온 「사자」-조난·억류 36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32일 동안 중공에 머무른 제67 금성호는 8월17일 제주도 서남방50「마일」동지나 해상에서 갈치잡이 도중 돌풍을 만나 기관실이 침수되면서 표류됐다. 통신기재마저 침수돼 SOS도 칠 수가 없었으며 계속 쏟아져 올라오는 물을 선내의 간막이 문을 닫아 간신히 막아가며 침몰을 막기 위한 사투를 다했다. 침수때 음식물을 다소 건져 허기는 당장 때울 수 있었으나 반찬이 없어 독에 불이 차 둥둥 뜨는 김치를 건져 먹었다.
식수는 한방울도 없어 냉동용 얼음을 녹이거나 빗물을 받아 타는 목을 겨우 축여 나갔다.
표류도중 마침 멀리 지나가는 배를 한척 발견, 『이젠, 살았다』고 모두들 옷을 벗어 휘두르고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쳤으나 못보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배는 시시각각 가라앉는데 눈앞에 다가온 구주의 꿈이 무산되자 선원들은 기진맥진.
이렇게 『될대로 되라』고 자포자기에 빠져있을 때인 21일 밤 선원들은 칠흑 같은 바다에서 중공어선에 기적적으로 구조됐다.
같은 돌풍에 행방불명 된 동료어선을 수색하러 나왔던 중공배에 우연히 우리배가 발견된 것이었다.
금성67호는 갑판과 「마스트」만 남고 선체가 거의 가라앉았을 때였다.
구조직후 선장 박삼택씨(32) 등 선원들은 손짓발짓으로 『고기를 잡다가 표류됐다』고 설명, 먹을 것과 돌풍때 가벼운 상처를 입은 몇몇 선원들의 치료 등 보호를 받았다.
중공어부들이 내민 먹을 것은 어른허리통 만한 대형 밀가루빵. 그러나 꼭 방석처럼 생겨 빵인줄 모르고 깔고 앉으려 하자 놀란 중공어부들이 먹는 것이라고 시늉을 해 보여 그제서야 모두들 둘러앉아 뜯어먹었다.
선원들은 거의 가라앉은 금성67호의 예인을 포기, 중공어선에 의해 밤중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섬으로 가 그곳 당국에 인계됐다. 뒤에 주산군도로 짐작했다.
선원들은 처음 인계된 섬에서 3일을 묵고 8월25일 역시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섬으로 이송됐다.
묵은 곳은 사방이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수용소 같은 인상의 큰집. 첫날은 큰방에 9명이 함께 수용되었다가 이튿날부터 두 방으로 갈라 잤다. 침대도 한사람 앞에1개씩 배당됐다.
이 섬에서 비로소 통역이 나왔다. 중년부인으로 전라도 말씨였으나 우리나라 사람인지 우리말을 배운 중국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으며 이름조차 대려들지 않았다.
일과는 하루 세끼 식사를 하고 일찍 자는 것이 거의 전부. 단체운동도 시키지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날라다 주는 식사만 할 따름이어서 무료한 나날이었다.
식사는 아침은 쌀죽이나 전복죽 같은 중국 죽이었고 점심과 저녁은 고기도 더러 나오는 중국음식이었다.
이 섬에 묵은 24일간 한두편의 영화를 보여주었으며 담배도 「필터」가 달린 것을 주는 등 궁색치 않게 대해주었다. 한마디로 조난 당한 선원으로서의 대우를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섬사람 등 다른 사람을 접촉할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 고역이었다.
이렇게 석방여부를 알 수 없어 불안한 가운데 망향을 달래던 지난17일 선원들은 뜻밖에도 『집으로 돌려 보내주겠다』는 통고를 받았으며 그날 저녁에 배갈도 나와 조촐한 자숙 「파티」를 가졌다. 술은 중간에도 한번 나와 모두 두번 마셨다.
이튿날 선원들은 작은 배로 귀로에 올라 1시간반 가량을 항해, 뭍에 닿았으며 다시 「마이크로버스」로 자갈길을 약4시간 달려 항주에 도착했다.
항주에선 약1시간 어떤 절을 관광시켜주었으며 거기서 1박을 하고 열차편으로 20일 광주로가 다시 하룻밤을 잔 뒤 21일 낮12시12분 중공과 「홍콩」접경인 「로우」역에서 「홍콩」정청관헌에게 무사히 인도됐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