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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 월드] 유엔 승인 없는 이라크 공격 적법성 논란 큰데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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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승인없이 이라크에 대한 군사공격 방침을 발표했어요. 1991년 걸프전 이후 12년 만에 재개되는 미국의 대(對) 이라크 전쟁은 유엔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부당한 전쟁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공격하는 미국의 논리와 이번 사태로 존립 위기에 놓인 유엔의 미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해요.

1. 미국이 유엔의 승인 없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부시 대통령은 지난 17일 대국민 연설에서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독재자에 대한 강력한 제재 조치를 마련해야 할 유엔 안보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제 우리가 그 역할을 대신하려고 한다"고 공격 이유를 밝혔어요. 이와 함께 미국은 테러 집단이나 테러를 지원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선제공격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어요. 이라크는 알 카에다를 비롯한 여러 테러 집단들을 지원하고 있고, 대량살상무기까지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무기들로 이라크가 미국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 한다는 거지요. 미국은 또 기존의 유엔 안보리 결의 중 이라크에 대한 무력행사를 승인한 90년의 678호와 이라크의 무조건적인 무장해제를 요구한 687호, 1441호가 이미 무력 사용을 승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어요.

2. 미국의 이같은 주장은 정당한 건가요.

이라크전에 반대하는 프랑스.독일.러시아를 비롯해 많은 나라들은 미국이 제시하는 논리를 '억지 주장'이라고 비난하고 있어요. 현행 국제법상 무력 사용의 정당성이 인정되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유엔 헌장 제7조에 규정된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무력을 사용하거나 유엔 안보리가 승인한 경우예요. 예외적으로 인권 보호라는 대전제(유엔 헌장 1조 3항, 55조) 하에 무력 사용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유엔 헌장만 놓고 보자면 안보리 결의 없이 치러지는 이번 전쟁은 부당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미국은 이번 전쟁이 유엔 헌장에 규정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유엔 사찰단이 보고서에서 밝혔듯 이라크가 당장 미국에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이라크는 유엔의 요구를 받아들여 알 사무드 미사일을 대량으로 파기하는 등 최대한 성의를 보였거든요. 따라서 당장 공격을 받거나 공격이 임박한 경우에 적용되는 '자위권 발동 ' 개념은 이번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다수 국제법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3. 유엔 안보리 승인없이 치러진 전쟁이 전에도 있었나요.

99년 코소보전과 2001년 아프가니스탄전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 위협으로 안보리 결의 없이 진행된 코소보 전쟁은 코소보의 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인종청소를 중단시키기 위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이뤄진 경우였어요. 아프간전 역시 9.11 테러를 자행한 알 카에다를 비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한 미국의 자위권 발동 차원의 공격이었죠.

두 전쟁 때도 정당성에 대한 논란은 있었지만 '인권보호'와 '자위권'이라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어요.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공격에 들어가면 이번 전쟁은 사실상 유엔 결의 없는 최초의 전쟁 사례로 남게 됩니다.

4. 이라크전의 결과에 따라 미국이 공격의 정당성을 확보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미국이 노리고 있는 게 바로 그거예요. 유엔 체제 안에서 이라크 공격의 근거를 마련하지는 못했지만 전쟁을 통해 이라크의 위험성과 위법성을 만천하에 밝혀내겠다는 게 미국의 계산입니다. 적법성은 없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내세운 전쟁 명분이 옳은 것으로 판명된다면 정당성은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죠.

미국이 내세운 이번 전쟁의 명분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은닉과 테러단체 지원입니다. 테러 단체와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연계는 전쟁을 통해서도 밝혀내기 어렵겠지만 대량살상무기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죠. 우선 이라크가 전쟁 과정에서 미군을 향해 생물.화학무기를 사용하거나 걸프전 때처럼 쿠르드족 반군이나 국내 저항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독가스를 사용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거든요. 이밖에 미군이 전쟁 중이나 종전 후 이라크가 은닉한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낼 가능성도 있고요.

5. 설사 전쟁의 명분이 확보된다 해도 전쟁에 이르는 과정에서 유엔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나요.

그렇죠. 유엔은 이번 사태로 역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이라크전이란 인류의 중요한 문제에 관해 합의를 보지 못한 것이지요. 더군다나 아무리 세계 최강국이라고 하지만 미국이라는 한 회원국이 유엔 결의 없이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유엔 권위에 상당한 타격이 됐어요.

이제 러시아나 중국.프랑스 같은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앞으로 자신들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 미국처럼 유엔을 우회하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할 우려가 있지요. 지금까지 유엔은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체제의 역할을 그런 대로 수행해 왔어요. 그런데 이라크전을 계기로 "이대로는 안된다"는 유엔 개혁론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6. 그렇다면 유엔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당장 유엔이 없어지거나 기능이 상실될 것으로 보기는 어려워요. 미국으로서는 이라크전 이후 복구사업을 비롯해 향후 국제질서 재편에 유엔을 이용해야 하는 사정이 있지요. 다른 나라들도 미국의 행동에 불만이 많지만 그렇다고 유엔이라는 틀을 깨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아요. 당장 유엔을 대신할 세계 안보체제도 없는 데다 유엔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많지요.

하지만 유엔이 옛날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을 겁니다. 미국은 주요 정책 추진에서 유엔을 끌어들일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려할 거예요. 프랑스.러시아 같은 반전 국가들도 유엔의 기능 한계를 절감했어요. 따라서 이런 한계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되 유엔이라는 전체 무대보다는 사안별로 미국에 맞서는 제한적 연합을 추구할 가능성이 커요. 유엔빌딩은 9.11 테러가 터진 뉴욕 무역센터 빌딩에 가까이에 서 있어요. 9.11의 여파가 드디어 유엔에까지 닥치고 있습니다. 세계 정치의 역동성을 볼 수 있는 사례지요.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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