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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첫 쪽의 ㄱ, 3000년 한자 문화 엎은 디자인 개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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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호 10면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양동 교수(오른쪽)와 안상수 디자이너. 한국문화의 원형은 태양숭배와 그에 따른 ‘빛살무늬토기’ ‘밝음의 미학’이며 한글이야말로 한민족 최고의 디자인이란다. 조용철 기자

“외국인들은 한국 하면 보통 사물놀이, 태권도김치태극기를 떠올려요. 하지만 그보다 앞서 꼽는 게 있어요. 역시 북한(North Korea)이죠. 부정적인 이미지예요. 그만큼 한국의 상징은 약하다는 뜻이지요. 한국인들은 K팝이나 드라마 같은 한류가 대단한 것처럼 여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시아에서의 일이고 미국이나 유럽 사회에서는 아직까지도 중국이나 일본의 강한 국가이미지 속에 묻혀 있어요.”

[연중 기획] 한국문화 대탐사 <6> 한민족의 상징체계

미국인 가야금병창 연주가 조세린(Jocelyn Clark) 배재대 교수의 지적이다. 그는 20년 동안 한국과 일본중국유럽을 오가며 다양한 문화를 접해 왔다.

국가상징은 국민을 통합하고 구심체 역할을 하는 공식적 표상이다. 국기나 국화(國花), 국가문장 등의 공식적 표상 외에 여러 비공식 상징물들이 국가이미지를 구축한다. 중국의 만리장성,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일본의 눈 덮인 후지산, 프랑스의 에펠탑,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대표적인 비공식 상징물들이다.

국가상징은 그 나라를 표상한다. 따라서 국가정체성을 좌우하고 국가브랜드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 국가상징을 통한 국가브랜드 구축이 곧 문화강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문화강국 대한민국, 나아가 통일한국의 국가상징과 국가브랜드를 모색해야 할 때다.

1 이순신 장군 동상 투구 위에 앉아 있는 새의 도안. 2 대한민국 문장이 찍힌 여권. 3 환두대도에 있는 새. 4 훈민정음(보진재 본) 첫 쪽. 왼쪽 맨 위에 ‘ㄱ’자가 보인다. 5 ‘빛살무늬토기’

이순신 동상 투구 끝 모양은 새의 문양
원로 서예가 김양동 계명대 석좌교수는 한국 고대문화의 원형을 탐구해 왔다. 지난 4일 디자인 대안학교 ‘파티(PaTI)’의 설립자 안상수(전 홍익대 교수) 디자이너와 함께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상징이기도 한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김양동 교수는 이순신 장군 동상의 투구를 가리켰다.

“저 투구 위에 뾰족한 세 가닥 조형물(아래 사진 1)이 뭐라고 생각해요? 흔히들 삼지창(三枝槍)이라고 합니다. 홍살문(능·사당·관아 정면에 세우는 붉은 물감 칠한 나무 문) 가운데 있는 태극문양 위의 세 가닥 조형물도 같은 모양입니다. 삼지창 같지만 세 갈래 창이 왜 거기에 있겠어요? 그건 새랍니다. 새 중의 왕, 매가 날개를 펼친 세련된 디자인이란 말입니다. 옛사람들은 매를 천조(天鳥), 신조(神鳥)로 여겼습니다. 삼족오(三足烏)도 태양숭배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죠. 이런 새 숭배는 신성성, 혹은 지도자를 뜻합니다. 소도(蘇塗)에 세우는 솟대에는 새가 올라가 있잖습니까? 우리가 ‘매를 든다’고 할 때 그 매는 우두머리 혹은 지도자가 들 수 있는 겁니다. 신라 금관에도 새의 도형이 장식돼 있잖아요? 관식(冠飾)이라는 겁니다. 환두대도(環頭大刀)에도 새가 등장하지요(사진 3). 역시 지도자를 뜻하는 표지입니다. 이렇듯 새의 문양은 한국문화 원형을 이해하는 아이콘입니다.”

환두대도나 관식의 문양은 신분과 지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의 투구 위 조형물에 대한 오해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홍살문 가운데 있는 태극문양 위에 왜 삼지창을 세우겠는가. 신성한 장소를 뜻하는 상징물인 새의 도안이라는 게 설득력 있다. 일본의 신사(神社) 앞에 세우는 ‘ㅠ’자 모양의 문 도리이(鳥居)는 더 모던한 양태를 띤다. 신조가 날개를 편 모양을 심플하게 디자인한 것이다. 중국의 화표(華表)도 그와 유사한 변형인데 기둥 위쪽에 날개 모양의 장식이 있어 그 원형을 담고 있다.

태극기의 중심에 있는 태극문양 또한 태양숭배 사상과 밀접하다. 음(陰)과 양(陽)이 서로 갈마드는 작용을 형상화한 문양으로 성리학에서는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원초적인 생명 에너지인 태양이 먼저 숭배대상이었고 그 상대 개념으로 태음(달)이 짝을 이루게 되었다. 태극문양은 아시아 일대에 널리 퍼진 상징물로 우리의 태극기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가 표상으로 삼고 있지만 세계인들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상징물이 되었다. 태극문양을 빼놓고 한국의 상징체계를 말할 수 없다.

“태극문양이나 새 숭배사상은 아시아인 혹은 세계인들과 공유하는 상징이지만 우리 고유의 뚜렷한 상징이 하나 있어요. 그게 바로 훈민정음, 한글입니다. 세종대왕은 한민족 최고의 디자이너였습니다.”

글자 디자인을 하는 안상수 타이포그래퍼(typographer)가 세종대왕 동상 앞에 서서 한글을 예찬했다. 그는 ‘우리나라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한문글자 가지고는 서로 잘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나날이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뿐이다’라는 서문을 들었다.

“훈민정음(보진재 본, 1986) 첫 쪽(사진 4)을 보세요. 7줄 세로 글씨들이 있는데 모두 한문 글씨들이고 오직 맨 끝줄 첫째 한 글자가 바로 한글 자음 ‘ㄱ’입니다. 이 ‘ㄱ’자 한 글자가 3000년 한자문화의 응축된 힘을 압도해버립니다. 600년 전 이 땅에는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혁명보다 더 큰 개벽(開闢)입니다. ‘ㄱ’자 한 글자가 새로운 문명, 새로운 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인 거죠. 세종대왕은 맨 먼저 우리말 소리가 중국과 ‘다르다’고 인식했어요. ‘다르다’는 인식은 대전환적인 발상을 하게 합니다. 한민족 역사상 중국과 다르다고 천명한 예는 처음일 겁니다. 이로써 겨레의 자존감, 겨레의 겨레다움, 우리 고유의 존재를 비로소 독자적 방식으로 드러낸 겁니다. 세종대왕은 창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다른 글자를 만들었어요. 만일 한글창제가 없었다면 우리 고유의 문화를 이만큼이라도 지닐 수 없었을 겁니다. 중국이나 일본에 문화적으로 종속된 나라가 됐을 겁니다. 한글창제로 우리는 우리의 문자를 통한 새로운 우주를 가지게 되었어요. 한글은 혁명적인 디자인입니다. 과학적이면서도 아주 쉽죠.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은 한글의 CM송 같은 문학작품입니다. 한글은 쉬운 디자인으로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안상수씨는 한글이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문화적 줏대를 가지고 디자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빗살’ 아닌 ‘빛살무늬’로 바꿔 불러야
한글에도 그대로 적용된 천지인( · - |) 삼재사상과 원방각(○□△) 문화원형, 빗살무늬토기(사진 5)도 우리 문화코드를 이해하는 핵심 문양이다. 문양은 일정한 질서에 의해 나라나 민족의 독특한 미술양식을 띠게 된다.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은 질그릇과 그 표면에 새긴 문양이다. 1만 년 전 신석기시대를 상징하는 유물인 빗살무늬토기에 우리 고대문화의 원형이 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문양이란 역사적 기억에 저장된 뇌의 지문 같은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형부터 이름을 잘못 붙이고 있어요. 빗살무늬토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머리 빗는 빗의 살 무늬, 너무 즉물적인 이름이죠. 그래 가지고는 원형의 상징과 철학을 상실하고 말아요. 빗의 문양을 토기에 새겨 넣었을 까닭이 없어요. 당연히 풍요를 비는 태양숭배 사상의 표현이죠. 햇살이 맞습니다. 따라서 빗살무늬토기가 아니라 ‘빛살무늬토기’로 바로잡아야 옳습니다. 그래야 한국문화의 원형과 상징을 제대로 이해하고 창의 DNA를 계발할 수가 있습니다.” 김양동 교수의 주장이다.

문화원형은 색채에도 담겨 있다. 한국의 색은 태양의 밝음을 뜻하는 흰색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달항아리와 흰옷이 대표적이다. 맑은 하늘색도 한국의 색이다. 태양광선은 공기의 습도나 조건에 따라 황색홍색적색 등으로 다르게 표현된다. 모두가 광명의 미(美), 곧 밝음의 미학에 속한다. ‘한(恨)의 미’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덧씌운 굴레일 뿐이다. 밝음의 미학은 광명개천(光明開天)홍익인간(弘益人間)재세이화(在世理化) 사상으로 발전한다.

한 나라의 상징체계는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한다. 나아가 외국인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다. 관광객이 늘고 수출이 증대되는 등 부가가치 창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한국문화가 세계 속으로 뻗어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상징은 아직 너무 약하다. 밖으로 뻗어가는 힘은 안으로 심화된 연구와 그를 통한 활용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문화현상을 좇는 데서 그치지 말고 한국의 상징체계에 대한 심층연구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유다. 그를 통해 다채로운 디자인으로 발전해 실체화되는 것이다.

통일한국의 상징체계 구축 또한 필요한 때다. 통일국가 한국의 브랜드파워는 막강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문화의 힘은 쉽고 편리한 한글의 힘이다. 세종의 창의성과 디자인 감각을 계승해 세상을 디자인해야 할 사명이 우리 후손에게 있다.



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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