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김용판 무죄, 정치공방의 대상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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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헌법이 재판의 독립을 규정한 건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만약 재판이 다른 국가기관이나 정치권, 여론의 영향에 좌우된다면 우리 모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재판의 독립은 사법 기능의 심장으로 판사들은 물론이고 법원, 나아가 전 사회가 함께 지켜야 할 문제다.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를 축소·은폐한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 지난 6일 무죄가 선고됐다. 담당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의 결론은 “검찰이 제시한 증거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 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핵심 증거인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판단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2012년 12월 수서경찰서의 보도자료 발표·언론 브리핑이 시기와 내용에 있어 최선의 것이었는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면서도 ‘의심스러운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1심 판결은 상급심을 거치며 검증 과정을 거치게 된다. 가장 큰 부담을 지게 된 것은 검찰이다. 재판부가 “검사의 주장과 논리가 우연적이고 지엽적인 사실의 조각들로 성글게 엮였다”고 지적함에 따라 검찰은 혐의를 뒷받침할 증거와 진술을 보강해야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재판의 과정 이다. 1심의 무죄 선고를 확정 판결인 양 섣불리 단정 짓거나 정치적으로 분식(粉飾)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은 김 전 청장 판결을 아전인수식으로 활용하기에 급급하다. 민주당은 “법과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적 판결” “정권 차원의 노골적인 수사 방해”라며 특검을 통한 재수사와 법무장관 해임 등을 주장하고 나섰다. 새누리당은 “국정원 사건을 침소봉대하며 대선 불복에 매달려 정치공세만 일삼아온 야당에 일침을 가한 것”이라며 민주당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 같은 주요 정당들의 행태는 앞으로의 재판에 직·간접적인 압박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미 트위터 등 SNS에선 해당 재판부를 향해 거친 발언들이 쏟아지고 있다. 법원 주변에선 “결론이 반대로 나왔다고 해도 어느 쪽에서든 공격을 받았을 것”이란 개탄이 나온다. 이렇게 판결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재판부를 미화하거나 비하한다면 판사들이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할 여지는 좁아지게 된다. 더욱이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재판이 같은 재판부 심리로 진행 중인 상황 아닌가.

 사법은 국민 신뢰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사법부 구성원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진영논리의 색안경을 쓰고 무죄냐, 유죄냐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습성도 버릴 때가 됐다. 판결을 비판하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재판 제도의 근본까지 흔들어선 안 된다. 정치적 중립지대에 있어야 할 판사들까지 “네 편” “내 편”으로 가르는 상황이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