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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일 영화 거장의 육성 "형·고모가 있었기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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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구 영화계에서 “동양 미의식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찬사를 받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들. ‘꿈’(1990).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김경남 옮김, 모비딕
356쪽, 1만6800원

단숨에 읽었다. 이 책은 이미 오래전 영어번역판을 중역해 『감독의 길』(1994)이란 제목으로 나왔던 적이 있다. 지금 절판된 그 책을 들고 이 책과 비교해 읽으니 같은 책이 맞나 싶다. 번역이 깔끔하고 정갈해 구로사와 아키라(<9ED2>澤明·1910~98)라는 한 인물이 많은 사람들과 사건을 겪고 섬세하고 유약한 아이에서 명망 높은 영화감독으로 올라서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일본 영화감독이다. 1950년 작품 ‘라쇼몽’으로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후 그는 일본에선 서구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비판을 받고, 서구에선 동양적인 미의식을 보여준다는 찬사를 동시에 받으며 세속적인 명예의 맨 꼭대기에 섰다. 대륙적인 스케일을 보여준 그의 영화는 일본영화산업이 기울기 시작한 1960년대 중반 이후 일본 내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말년으로 갈수록 작품연출 횟수는 뜸해졌지만 그럴수록 거장의 전설은 더 쌓여갔다. 화가 출신인 그의 영화는 존 포드로 대표되는 미국 고전기 영화의 화면 스타일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면서 가부키 등의 일본 전통 연희 양식을 결합시킨 ‘절충 미학’의 최고봉이었다.

왼쪽부터 ‘가게무샤’(1980), ‘요짐보’(1961), ‘꿈’(1990). [중앙포토]

 구로사와 아키라를 둘러싼 이런 영화사적 지식과 정보는 이 책에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책은 구로사와가 ‘라쇼몽’으로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받는 시점에 끝난다. 구로사와가 막 감독 경력의 전성기를 여는 대목에서 구로사와는 더 이상의 회고를 멈춘다. 그런데도 이 책은 어떤 영화사 책이나 비평만큼 구로사와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이 책에서 구로사와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을 언급하는데 각각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의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여서 두 살 무렵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를 엎고 나동그라진 일화까지 세세히 묘사한다. 아기였던 자신을 돌보던 보모 할머니 등에 업혀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갔던 일을 기억해내곤 그게 화장실이 아니었을까 추론한다.

 구로사와의 회고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모든 사람을 기억해내고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고모님은 걸으면서 이야기를 하시는 법이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늘 종이에 싼 은화 50전을 내게 주시며 ‘사라바(그럼 안녕)’라고 한마디만 하셨다. 당시의 50전은 아이에게 거금이었다. 그렇다고 돈 때문에 고모님을 따라다닌 건 아니다. ‘사라바’라는 말에 뭐라고 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한마디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정감이 있었다.”

‘가게무샤’ 촬영장을 찾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운데) 감독과 조지 루카스(오른쪽) 감독. 왼쪽이 구로사와 감독. [중앙포토]

 서투르고 유약한 어린 구로사와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아니, 그들에게서 육친과 스승과 친구의 정을 느끼는 남다른 인간적 면모가 구로사와에게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던 친형이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성숙시켰는지 돌이키는 세세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자살하겠다고 결심한 것을 실행에 옮긴 형의 피투성이 시신 앞에서 구로사와가 느낀 감정을 돌이키는 대목 같은 경우다. 담백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결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놓고 후회하는데, 이런 모습은 거꾸로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긍정하게 만든다. 그가 처음 조감독으로 사숙했던 야마모토 가지로(山本嘉次郞) 감독과의 여러 현장 일화도 마찬가지다. 좋은 제자는 스승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일깨운다.

 영화감독이 된 후 이미 튼튼한 거인이 된 구로사와는 자기의 예술관을 펼치기 위해 거듭 주변의 환경과 맞서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선다. 이 책이 ‘라쇼몽’ 개봉 무렵에 끝나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 ‘라쇼몽’은 제작사로부터 버림받았고 흥행에서 실패했지만 한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 내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베니스에 출품되어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구로사와는 당시 제작사 대표가 훗날 텔레비전 인터뷰에 나와 모든 공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잘난 척하는 모습을 얘기하고는 그게 인간의 모습이라고 씁쓸해 한다.

 전성기를 맞은 이후 감독 구로사와는 인생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는 제자가 아니라 후배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는 선배이자 스승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스승인 그는 잘난 척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구로사와의 회고가 ‘라쇼몽’에서 끝나는 이유는 바로 그게 아닐까. 그것만으로도 실은 충분하다.

김영진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김영진 영화평론가. 전주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영화전문지 기자를 거쳐 현재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저서 『영화가 욕망하는 것들』『평론가 매혈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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