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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하얀 침묵'에 잠긴 겨울 울릉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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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장 사진이 아니다. 1월에만 150㎝ 이상 눈이 쌓인 울릉도 풍경이다. 울릉산악회 최희찬씨가 산악스키로 성인봉을 오르고 있다. 뒤쪽으로 저동항이 보인다.

단언컨대, 한반도에서 가장 이국적인 겨울 풍경은 울릉도에 있다. 아니, 예부터 울릉도는 그냥 이국(異國)이었다. 고대로부터 뭍의 세상과 동떨어져 ‘우산국(于山國)’으로 존재했던 지역이다. 이 나라의 겨울 이름은 ‘설국’이다.

서울은 눈이 3㎝만 쌓여도 교통이 마비되고 난리법석인데, 울릉도에선 30㎝는 쌓여야 눈이 ‘쪼매’ 왔다 한다. 지난 1월 한 달의 누적 적설량만 1m가 훌쩍 넘는다. 평년 수준이다. 이것도 도동에 있는 기상대 기준이다. 북쪽의 나리분지는 도동의 두 배다. 전국의 허다한 ‘눈 명소’를 뒤로하고 눈 구경하겠다고 울릉도행을 결심한 까닭이다.

‘운항 없음’, ‘운항 없음’. 1월 초부터 여객선사의 웹사이트에는 며칠째 같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번번이 타이밍이 맞지 않았고, 바닷길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섬은 더 비밀스러웠고, 기대감은 덩달아 커졌다. 취재 예정일로부터 사흘을 지나서야 배는 경북 포항의 항구를 떴다.

배가 기어이 도동항에 닿았다. 섬의 풍경은 세마포를 뒤집어 쓴 신부처럼 하얗고 얌전했다. 여객선이 들어오자 항구는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딱 그때만이었다. 이내 섬은 눈꽃의 화음 속에 하얀 침묵에 잠겼다.

울릉도에 머문 사흘. 눈이 가진 신비한 힘을 만날 수 있었다. 온 지면을 평등하게 보듬는 힘, 저마다 색깔을 자랑하는 존재를 하얗게 덮어 겸허히 잠재우는 힘, 차가운 감촉에도 따스함을 전해주는 힘 말이다.

겨울 성인봉은 안내판이 있어도 길 찾기가 어렵다. 반드시 전문가와 동행해야 한다.

설국 울릉도의 진면목은 성인봉(986m)을 오르면서 맛보았다. 화산 활동으로 생긴 울릉도는 섬인 동시에 산이다.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은 눈과의 한판 사투였다. 골짜기마다 바위틈마다 가득가득 눈을 쟁인 산을 걷는 건, 흡사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았다.

굳이 봉우리를 오르지 않아도 겨울 울릉도는 좋았다. 날마다 일상이라는 고단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우리에게 울릉도는 ‘나리분지’라는 너른 품을 선뜻 내어줬다. 산 중턱에 거짓말처럼 펼쳐진 평원은 엄마 품처럼 마냥 포근했다. 갖가지 좋은 재료로 우려내고 버무린 음식은 뭍에서 만날 수 없는 맛이라 더 특별했다. 오징어내장탕과 약소고기를 다시 먹으려면 또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니, 섬을 떠나는 순간 그리워졌다.

한겨울 울릉도 여행은 여러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10시간은 더 걸린다. 태평양 너머 미국까지 가는 것과 맞먹는 시간이다. 아니, 내일 아침 배가 뜰지 가늠할 수 없으니 더 먼 이국이다. 그럼에도 일생에 한 번은, 겨울 울릉도를 만나봐야 한다. 고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만날 만한 우주적인 풍경이 거기에 있다.

글=최승표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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