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을 방치한 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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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l7시간의 대치였다는 말인가.
1백50여 무장경찰들의 물샐틈없는 포위망 속에서 살인강도 이종대는 황은경 여인·태양군·큰별 군 등 세 가족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원 세상에, 경찰의 눈앞에서 또 다른 어마어마한 살인이 저질러졌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은 그를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말인가. 그 법석을 떨고 1대1백50의 대치를 통해서 경찰이 기대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범인의 생포란 말인가. 범인은 잡았는가.
이종대는 경찰의 눈앞에서 자결을 했다. 결국 포위경찰은 오직 시체의 운 구를 위해서 17시간동안이나 수선을 떨고 있었던 셈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경찰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던, 그리고 착실하게 진행되고있던 죽음을 기다리면서 창 밖 지척지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는 것 밖에 더되는가.
그의 말로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단말마의 최후의 순간을, 만일 경찰이 그동안 허탕치고 늑장부린 미제 강력 사건의 수사증거를 뒤늦게 야 한꺼번에 학보하기 위해서 이용하려했다면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본말전도라 할 수밖에 없다.
이종대가 세든 자기 집에서 경찰에 포위된 뒤에도 인질로 삼던 아내와 두 자식을 쏴 죽이기까지는 두 시간동안이나 여유가 있었다. 이 동안에 만일 경찰이 창 너머 구차한 대화를 통해서 범인으로부터 미제사건의 수사단서를 얻으려하는데 급급하기 보다 우선 인질 된 세 목숨의 구제에 주력했던들 경찰이 지켜보는 집안에서의 끔찍한 살인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다. 더우이 그전날밤 공범 문도석이 스스로의 죽음 길에 처자식을 강제로 동행하려했던 전례에 비춰보더라도 이종대의 손아귀에 있는 세 목숨의 안위는 포위경찰의 첫째 관심사가 되어서 마땅했을 줄 믿는다. 더우이 문도석의 처가 일가집단자결을 거부하고 막내아이를 업은 채 도망쳐 나온 경위를 상기하면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 제 아비 손에 차례차례 죽어간 세 생명이 무엇보다도 불쌍하기만 하다.
살인강도에게 사람의 목숨을 존중해달라는 말을 할 입도 없지만,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일 살인강도도 없다. 인명을 존중해달라는 호소가 허공을 향한 염불이 아니라면 그것은 인명보호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이다.
경찰의 수사장비가 미비하고 수사비가 부족하고 그 기동력이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 큰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은 또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동안 갖가지 강력범사건의 수사가 매번 미궁에 빠진 것이 큰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도 또한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고 설혹 범인 이종대가 말한 대로 돈 만여 원에 경관을 매수하여 수사망을 뚫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도 또 다른 문제이다.
여기 자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국립경찰이 시민의 인명존중에 과연 절대적인 우선권을 두고 있느냐 하는 문체이다. 구제대상이 되는 목숨이 법인의 아내냐 자식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경찰은 미제사건의 수사를 위해 인명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생각이라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또 한사람이라도 인명을 건지기 위해서는 차라리 미제사건의 물증확보쯤은 뒤로 미뤄야 옳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종대의 아내가 살아 나왔다면 오히려 그것이 미제사건수사에 더욱 유리했을 수도 있으리라하는 아쉬움도 있으나 그러한 계산에 앞서 억울하게 많은 목숨을 죽게 한 책임이 무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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