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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의 뿌리는 나뿐 … 좋은의 어원은 주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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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심장의 피를 따라서 붉은 포도주 한 잔 건네고 싶은 심정입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메시지는 절박했다. 시인 박노해(57·본명 박기평)가 이 시대 청춘에게 던지는 한마디다. 30년 전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시집 『노동의 새벽』에서 당시 ‘공돌이 공순이’에게 차가운 소주 한 잔을 권했던 그다.

 “그 시대는 모두 뜨거웠다. 그들의 울분을 식혀주려 했다. 그런데 지금 젊은이들은 너무 무기력하다. 삶의 혁명을 권하고 싶다. 혁명은 옛것을 파괴하고 새것을 만드는 게 아니다. 영어 ‘레볼루션(Revolution)’이 그렇다. 본래 자신을 찾는 것이다. 첫사랑의 순수함 같은 것 말이다.”

젊은이여, 당신의 삶을 혁명하라

아시아 각국의 전통공동체에서 현대문명의 대안을 찾고 있는 박노해 시인. 그는 “남들이 변절자라 하든, 빨갱이라 하든 나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씨가 오랜 묵언(默言) 끝에 폭포수 같은 말을 쏟아냈다. 설 연휴 직후인 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만난 자리에서다. 그는 5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같은 장소에서 사진전 ‘다른 길’을 연다. 인도네시아·파키스탄·라오스·미얀마·인도·티베트의 토박이 마을을 돌며 그곳의 땅과 사람,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현장을 포착한 흑백사진 120여 장을 내놓았다. 한 폭의 정지된 풍경화마냥 자연에 순응하고 서로 우애 있게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경쟁문화에서 벗어나는 길을 탐색하고 있다. 같은 제목의 사진에세이집도 함께 냈다. 1998년 출소 이후 ‘사회혁명가’에서 ‘문명운동가’로 돌아선 그의 육성을 들어봤다.

 - 설 연휴 전시 준비로 바빴겠다.

 “6월께 낼 책 원고도 다듬었다. 경기도 시흥의 어머니께 인사도 갔다. 『노동의 새벽』을 썼던 15평짜리 연립이다. 어머니께선 35년째 그곳에 살고 계신다. 신부인 형과 수녀인 여동생도 함께했다.”

 -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나.

 “부농의 막내딸이셨다. 가난한 남편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평생 경우가 바르셨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호래자식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집안 댓돌에 아버지께서 신으시던 하얀 고무신을 항상 올려놓으셨던 분이다. 평생을 하루 네 시간 이상 기도하셨다. 정의와 선에 대한 믿음은 수도자보다 더하셨다.”

‘잘 살아보세’ vs ‘고르게 사세’ 끝

 - 세 번째 사진전이다. (박씨는 4년 전 아프리카·중동·중남미 등 빈국과 분쟁 지역에서 찍은 흑백사진을 모아 두 차례 사진전을 열었다.)

 “91년 사형을 구형받을 때 사회주의 붕괴 소식을 들었다. ‘한 시대는 끝나고, 나는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잘 살아보세’(자본주의)와 ‘고르게 잘 살아보세’(사회주의)의 대립구도는 끝났다고 판단했다. 분단의 섬에, 지극히 통제된 환경에 갇혀 지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다시 살아 나가면 전 세계 문제현장을 밟아보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보자고, 그때까진 침묵하겠다고 결심했다.”

 - 그래서 입을 열게 됐나.

 “내가 살아남은 건 87년 서울대 박종철군이 고문당하다 죽은 덕분이다. 살아남은 자의 책무를 절감했다. 출소 이후 내 자신을 국경 너머, 경계 밖으로 추방시켰다. 만년필과 낡은 카메라를 들고 유랑에 나섰다. 인류를 먹여 살릴 한 뼘의 대지를 일구는 사람들을 만났다.”

 - 따로 사진을 배우지 않았는데.

 “연출 하나 없이 찍었다. 특별히 구도도 잡지 않았다. 모두 수동 라이카 카메라로 찍었다. 카메라 구석구석을 알게 돼 고장이 나도 고칠 수 있다. 디지털카메라였다면 열 번쯤 바꿔야 했을 것이다.”

민주화 이뤘지만 인간에 예의 잃어

 - 굳이 외국까지 갈 필요가 있었나. 우리 안의 문제도 산적한데.

 “알고 있다. 양극화를 해소해야 하고, 약자의 인권도 옹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우리 사회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여느 시골집 옷장에도 안 입는 옷이 쌓여 있다. 소비문명의, 석유경제의 정점에 서 있는 거다. 중국·인도 등의 모든 사람이 우리의 최하위 10%처럼 산다면 지구가 열 개라도 자원이 모자랄 것이다.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다른 길’인가. 옛날로 돌아가자는 건 시대착오 아닌가.

 “그렇지 않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에겐 품위와 품격이 있었다. 정갈한 문화가 있었다. 노동자 시절 전국 8도에 친구가 있었는데, 어디를 가도 이불 홑청 새로 빨아 풀을 먹여주셨던 어머니·할머니가 계셨다. 우리말로 ‘찹찹하다’(가깝고 살뜰하다)고 한다. 80년대 들어 민주화를 이뤘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와 도리를 잃게 됐다. 이권다툼으로 전락한 진보 진영에서 빠진 것도 이런 거다. ‘앞선 과거’를 회복해 새 문명을 일으키자는 뜻이다.”

 -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우리 시대 지성 한 분이 ‘착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말도 안 된다. 착한 사람은 그 자체로 잘 산 것이다. ‘잘 사는 사회’가 ‘돈 잘 버는’ 사회인가. 우리는 탐욕의 포퓰리즘에 빠졌다. 요즘 ‘대박 대박’ 하는데 대박은 누군가의 ‘쪽박’이다. ‘나쁜’ 꿈이다. ‘나쁜’의 어원은 ‘나뿐’이다. 불교의 아상(我相)이다. 깨뜨려야 한다. 반대로 ‘좋은’의 뿌리는 ‘주는’이다. 대박 대신 ‘소박’을 되찾자.”

 얘기는 ‘지금, 여기’로 모아졌다. 100만 부 가까이 팔린 『노동의 새벽』은 87년 민주화운동의 작은 불씨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87년 민주화의 산물인 대통령 5년 단임제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요즘이다.

 - 여야 모두 87년 체제 극복을 말하고 있다.

 “386세대가 주류로 진입하면서 예전의 운동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거나 출세를 하는 수단이 됐다. 사회운동이 스펙을 쌓고 투자를 하는 것인가. 진보든 보수든, 좌든 우든 모두 낡은 진영논리에 갇혔다. 모든 게 돈(화폐)으로 귀결된다. 이념은 껍데기다. 강을 건너는 뗏목에 불과하다. 강(민주화)을 건넜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근원을 고민해야 한다.”

진영논리 … 이념은 껍데기일 뿐

 - 요즘 국제정세가 100년 전을 닮았다는 분석이 많다.

 “이제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다. 중국이 덩치만 큰 고래라면 우리는 작지만 날렵한, 머리 좋은 고래다. 경제도, 정치도 강한 국가로 올라섰다. 다만 그에 걸맞은 책임은 다하고 있지 않다. 중국은 국가독점체제다. 유연성이 부족하다. 우경화로 돌아선 일본도 카드를 거의 다 쓴 상태다. 이럴 때 우리가 새로운 생활양식을 제시해야 한다.”

 - 북한 문제가 남아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대박’ 표현이 천박했지만 통일이 남북 주변국 모두에 득이 된다는 인식은 긍정적으로 본다. 답은 남북 교류와 화해밖에 없다.”

 - 한국사의 대전환을 꼽는다면.

 “올해가 동학 120년이다. 사람들은 실패한 사건으로 본다. 아니다. 인류사의 유례없는 혁명이었다. 시천주(侍天主), 사람이 하늘이라고 했다. 양반과 노비, 기존의 신분질서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들었다.”

공돌이·촌놈 … 상처가 내 경쟁력

 - 이 시대 청년들을 걱정한다.

 “내가 지금까지 온 것은 약점 때문이다. 촌놈이고, 상고(선린상고 야간) 출신이고, 공돌이였다. 그게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됐다. 상처가 최고의 ‘경쟁력’이 된 거다. 가장 힘 센 것은 역시 슬픔인 것 같다. 삶은 기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선물로 받았다. 일자리가 없다고, 돈이 적다고 자신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한다. 만약 돈을 벌게 되면 그 반대로 행동할 것인가.”

 - 원인이 무엇일까.

 “부모들이 입버릇처럼 ‘나처럼 살면 안 된다’고 한다. 진짜 삶을 유보하고 돈만, 수단만 내세운다. 인생은 하루살이다. 티베트 유목민처럼 세상에 잠시 천막을 친 거다.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가. 탐욕으로 우울증이 생기고, 자살만 늘어난다.”

 - 본인은 어떻게 사나.

 “시골 셋집에 산다. 하루 15시간씩 책 읽고, 글 쓰고…. 한 달 100만원이면 족하다. 매일을 불태우니 오늘 죽어도 좋다. 분쟁지역에 가는 비행기에 탈 때마다 유서를 새로 쓴다. 삶의 어원은 ‘사름’이다. 충만한 삶은 축적이 아닌 소멸에서 온다.”

글=박정호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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