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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5) 제자 이호벽|<제38화>약사창업(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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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매약2호 됴고약
천일약방 「됴(조)고약」은 대정 2년(1913년)에 공포된 새 약률에 따라 모든 의약품제조가 총독부의 허가제로 되면서 선두를 장식한 매약 허가번호 2호. (28년도 여름부터 천일약방에서 일한 종로구 인사동 27 동양한의원 주인 박영덕씨의 구전으로 허가번호 1호는 제생당의 소화제 청심보명단인 것으로 박씨는 기억하고있다.
매약의 고참병답게(?) 됴고약은 처음 효교 조근창의 집 뜰에서 대야에 끓여졌다.
박영덕씨(71)에 듣기로는 첫 공장인 조근창의 집은 당시의 효교에서 지금의 천일백화점 쪽을 향해 길가로 두 번째 집으로, 대문을 열면 행랑채이고 중문 안이 살림집인 7∼8간 짜리 단층 기와집.
조근창은 이 행랑채 뜰 안에다 놋대야도 아닌 함석대야 하나를 덩그렇게 걸어놓고 장작불을 지펴 시꺼먼 고약을 끓여냈다는 것이다. 약업이라고 하기가 쑥스러울 정도였다는 것.
조근창의 나이 40여세이고 그 뒤 유업을 잇는 맏아들 인섭이 22세일 때였다.
그러나 됴고약은 몇 년이 안 가서 큰돈을 벌어 천일백화점 못 미쳐에 있는 1백평 가량의 2층 벽돌집 공장을 갖게 되고 이후 여기서 만들어졌다.
작업장은 사방12자, 2층 구석방이었다.
시설은 높이1m의 가마솥과 함석대야가 전부였다. 효교 집 뜰에서 만들 때보다 가마솥이 하나 더 는 셈.
조근창은 친구 아들인 최희남(당시 20세 가량·현재 대한극장 부근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에게 자신의 제조법을 전수, 일을 시켰다.
일이라 했댔자 가마솥에 원료약재와 참기름을 붓고 끓인 뒤 받침대야에 여과시키고 이어 일정한 양을 뜯어내 유지로 싸면 되는 간단한 과정.
최희남은 약재를 고는 일은 소년 2∼3명을 데리고 했고 여과 및 소분은 흰 저고리와 까만 치마의 「가운」을 입은 소녀들을 부렸었다. 그러나 처음 약재를 참기름에 고는데는 무슨 비전의 방법이 있었던지 최희남은 약재 배합 및 「보일링」과정은 꼭 밖으로 자물쇠를 채워놓고 직접 했으며 포장까지의 작업이 끝나면 다시 자물쇠를 채워 아무도 못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됴고약의 정체가 이렇게 은밀히 만들어져야 할만큼 비전의 약이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이 있다.
당시엔 조근창 가전의 묘약으로 일반에 알려졌지만 실은 방약합편의 만병무우고 처방대로 조제했다는 박영덕씨의 밝힘이 있기 때문이다. 황단·참기름 등 가마솥에 들어가는 15가지 약재가 무우고 그대로라는 것으로 박씨는 처음 선전부원에서 출발, 판매책임자·지배인을 거쳐 마지막엔 전무취체역까지 한 분이어서 헛말이 아닐는지 모른다.
그러나 처방의 내막이야 어떻든 됴고약은 당시 날로 인기를 더해 한 봉지에 5원 짜리와 10원 짜리 두 가지 형태로 전국을 휩쓸었다.
불망고(모범매약) 만응고(조선매약) 청고약(공애당) 신비고(제생당) 등 숱한 유사품이 쏟아져 나왔으나 도저히 이 됴고약의 적수가 안됐다. 다 같은 방약합편의 처방을 따라 만들었는데도 이랬으니 약에도 운이 따르는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됴고약의 전성기를 가져온 이 『비밀의 공장』은 그 뒤 두 차례나 불이나 『불길처럼 이는 천일 약방의 조짐』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는데 과연 천일은 그 뒤 「톱·메이커」가 됐다.
처음 불은 이사한 뒤 얼마 안돼서 났다. 사무실에서 발화했으나 다행히 불길이 그 이상 번지지 않아 큰 피해 없이 꺼졌다.
두 번째 불은 고약 작업장 옆 창고에서 일어났다. 이 창고에는 들깨기름을 먹인 장판지 즉, 됴고약 포장유지를 잔뜩 쌓아 두었는데 이 장판이 굳으면서 일어난 열로 자연 발화된 것. 아마 1930년 전후의 일로 기억된다.
불은 첫 번과는 달리 전 공장에 번져 사무실은 물론 창고 가득히 재놓은 값비싼 한약재까지 모두 태웠다.
그러나 이 불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건물이 그 당시로는 드물게 화재보험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보험회사(이름 불명)의 피해 평가액이 액수를 기억치는 못하나 실 손해의 1·5∼2배 가까 이나 나와 그 당시 짓고 있던 3층 새 공장(지금의 천일백화점이 그 것)을 단시일에 거뜬히 완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확실히 불이 천일을 일으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창업자 조근창은 약방을 현 천일백화점 자리에 옮긴 뒤 여기에 양약부·한약부·매약부 등을 설치, 천일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다음 35년 전후 별세했다.
그가 만든 한약부는 당시 화교들을 수명 고용, 중국 대륙과 본격적인 당재무역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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