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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모여 사는 '리틀 도쿄', 한국 '관광객'도 많이 찾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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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이촌동은 이촌 현대맨션과 건영한가람·이촌현대 아파트 단지 등과 접한 1.5㎞의 비교적 짧은 구간이 메인 상권이다. 또 남쪽은 한강과 강변북로, 북·동·서쪽은 철로와 주한미군 기지 등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항아리형 상권이기도 하다. 동부이촌동 상권만 컬러로 처리했다. [사진 네이버 지도 항공뷰]

지난 연말 오후. 중앙선·지하철 4호선 이촌역 4번 출구에서 5분쯤 걸어나오자 일본어 대화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대로변 인도에 한줄로 길게 늘어 서 있는 30~40대 주부들이었다. 추운 날씨에 모두들 긴 코트를 걸치고 목도리를 둘러매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유모차를 끌고 있었다. 대로에는 ‘2?車’(2호차)라 적은 종이를 붙인 45인승 버스가 막 정차하려는 참이었다. 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초등학생 1~2학년쯤으로 보이는 학생 20~30명이 내렸다. 상암동 일본인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이었다. ‘리틀 도쿄’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용산구 동부이촌동은 정말 일본 타운이었다.

아파트 단지와 단지 가운데 있는 도로변으로 상가가 들어서 있다.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정책본부·용산구청이 추정하는 동부이촌동의 일본인 거주자는 1019명으로, 서울시 전체 일본인 거주자의 11.5%다(지난해 12월 31일 기준).

 이촌동에 일본인이 모여 살게 된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용산 자체가 일본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가 일본인 거주지로 개발한 지역이다. 이미 조선인이 자리잡고 살던 사대문 안을 피해 쾌적하고 깔끔한 일본인 거주지로 새로 개발한 거다.

 또 다른 배경으로는 1971년 중산층 대상으로 서울에 지어진 한강맨션이 꼽힌다. 30평(100㎡) 이상 아파트가 들어선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강남보다 10년 가량 앞선다. 이전에 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지면서 공무원·기업 주재원 등 많은 일본인이 이곳에 정착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냈던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당시 우리보다 생활수준이 월등히 높았던 일본인 눈에 서울은 불결하고 불편한 도시였다”고 말했다. 그는 “강남은 논밭으로 뒤덮인 벌판이었고 강북은 전쟁 폐허로부터 아직 복구되지 못했던 때”라며 “일본인이 그나마 살 수 있었던 곳이 동부이촌동의 중산층 아파트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불과 20여 년 전까지도 총독부 관계자 등 일본인이 모여살던 주거지라는 역사도 호감을 주었을 것이다.

 일본인이 모여살고 있지만 겉으로는 그런 흔적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선 서울의 여느 동네와 전혀 다를 게 없다. 외교부의 한 관계자는 “남에게 드러나기 싫어하는 일본인 특유의 성품 탓도 있겠지만 반일감정 등 때문에 티 내기가 더욱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동네를 잠시만 돌아다녀봐도 왜 이곳이 리틀 도쿄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가게들이 내건 일본어 홍보문구과 곳곳에 있는 일식점 때문이다.

‘리틀 도쿄’라는 별명에 걸맞게 이곳에선 일본어 안내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공인중개소 유리창에 ‘일본인(日本人) 상담’이란 안내문이 보인다.

 동부이촌동 메인 상권은 두산위브 아파트부터 금강아산병원에 이르는 1.5㎞ 구간의 5차선 도로 양쪽에 있는 상가가 주축이다. 굳이 일본제품과 관련한 상점이 아니더라도 일본어로 간판이나 안내문을 쓴 가게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예컨대 휴대전화 전문점이나 은행에도 일본어로 된 설명서가 가게 유리창에 붙어있다. 한 카페 앞 메뉴판에는 ‘カステラ(카스테라)·パンケ-キ(팬케이크)·카페모카(モカコ-ヒ-)’라고 적혀 있었다. 수퍼마켓이나 문방구에서는 일본어로 대화하는 일본인 가족도 눈에 띄었다. 일본 식자재를 파는 가게도 성업 중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용실조차 일본인 헤어디자이너가 일본 스타일로 자른다는 곳이 많다. 이 가운데는 일본 미용실의 한국 지점도 있다. 인근에 사는 일본인이 주 고객이지만 일본 스타일을 원하는 한국 고객도 적지 않다는 게 미용실 측의 설명이다.

 강보라(36) 이무스 헤어숍 원장은 “고객 30%가 일본인 고객”이라며 “일본인이 원하는 헤어스타일은 한국인과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강원장은 15년간 일본 도쿄의 한 헤어숍에서 일하다 1년 전 이촌동에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그는 “많은 일본인이 한국 헤어스타일이 촌스럽다고 생각한다”며 “한국 스타일이 무겁고 인위적인 20~30년 전 일본 헤어스타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근 C 미용실의 헤어디자이너 민희(32)씨 얘기도 비슷하다. “그나마 지금은 K팝 인기로 일본 남자가 한국스타일을 따라하기도 하지만 일본 여성은 커트와 퍼머·염색 등 모든 한국 스타일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동부이촌동을 가장 일본스럽게 만드는 상권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맛집이다. 사전예약하지 않으면 맛보기 어려운 스시 전문점 ‘기꾸’뿐만 아니라 일본 셰프가 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최근엔 일본집 대신 다양한 맛집이 들어서고 있다.

 주말이면 DSLR 카메라를 들고 몰려드는 ‘이방인’을 카페나 베이커리 등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강남에서 장사 하다 5년 전 이곳으로 옮겨 일본 가정식 음식점 ‘이꼬이’를 하는 정지원 셰프는 “대규모 중산층 주거지역에 외부 관광객이 모여드는 상권은 서울에서 아마 이곳뿐일 것”이라며 “압구정동이나 반포동에는 없는 동부이촌동만의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곳의 식당의 5곳 중 2곳은 일식당이다.

 동부이촌동에 자리잡은 음식점 40여 곳(분식점과 이자카야 등 술집 제외) 가운데 일식점은 16개다. 이곳 식당 5곳 중 2곳은 일식점인 셈이다. 단품 메뉴 가격이 1만3000~1만5000원대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저렴한 편은 아니다. 정 셰프는 “이곳 고객은 대부분 의사·변호사·사진작가 등 전문직이나 일본 언론사의 한국특파원이나 주재원들”이라며 “가격보다는 맛과 편안한 분위기를 중요시하는 계층이라 가격 저항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식당 등 일본인을 상대로 한 장사가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정우림 용산부동산중개업 대표는 “예전에는 일본인이 굉장히 많았는데 적지 않은 일본 전자업체 등이 한국에서 철수하면서 이곳을 뜨는 일본인이 늘었다”며 “아마 과거 일본인 거주자의 60% 수준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선 동부이촌동 상권을 여전히 좋게 전망한다. 서울 다른 지역에 비해 주거환경이 좋기 때문이다. 동부이촌동에서 식당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상점은 여성의류(52), 부동산(41), 헤어숍(18), 일반병원(17), 치과(15), 은행(12) 순이다(메인 도로 기준). 

대학 시간강사인 나가사와 히로코(40)는 “동부이촌동은 아이들과 함께 살기 좋은 환경”이라며 “강남처럼 번잡하지도, 강북처럼 시끄럽지도 않아 좋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곳 지형은 들어오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어렵다는 항아리 상권이다. 신천역 일대 엘스·리센츠 아파트 등 잠실 상권을 떠올리면 된다. 아니, 항아리 상권의 특징은 이곳이 더 강하다. 주변이 한강과 철로·주한미군 기지 등으로 둘러싸여 동부이촌동 외에는 사방으로 제대로 된 상권이 형성되지 않았다. 이 지역 한 부동산 관계자는 “한강과 기찻길로 막혀 있어 ‘섬’ 같은 상권이라 주변으로 확장할 수 없다”며 “이 동네를 벗어나 (다른 상권에 가려면) 멀리 가야 하기 때문에 주민 대부분이 웬만한 건 이 안에서 다 해결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만큼 상가 임대료는 만만치 않다. 메인 거리의 권리금만 2억원 정도다. 또 다른 부동산 관계자는 “유동인구도 많지 않은데 다들 꿋꿋이 버티는 걸 보고 많은 상가 전문가들이 동부이촌동을 이상한 동네라고 한다”며 “33㎡(10평) 기준으로 보증금이 5000만~1억원 선이고, 월세는 250만~350만원 선”이라고 말했다.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신사동 가로수길과 비슷한 수준이다.

글=유성운·조한대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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