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최후통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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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따르면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최후통첩을 보낸 것은 기원전 431년이다.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아테네가 기존의 강국 스파르타에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자신들의 서쪽에 붙어 있는 인접국 메가라의 외부 교역을 봉쇄했는데, 메가라는 스파르타의 동맹국이었다. 스파르타는 "봉쇄를 풀지 않으면 전쟁"이라고 경고했지만 아테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후통첩의 역사는 길다. 최후통첩을 뜻하는 외교용어인 '얼티메이텀(Ultimatum)'은 라틴어로 '최후''마지막'이란 의미다. 흔히 최후통첩엔 마지막으로 보내는 조건과 시한이 붙어 다닌다.

조건이 충족되지 못할 경우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경고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최후통첩은 전쟁을 피해 보자는 마지막 노력이라기보다 선전포고를 위한 최후의 수순이다.

최후통첩이 전쟁의 한 형식으로 국제사회에 정착한 계기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다. 고종 황제가 밀파한 이준 열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방해로 회의 참석조차 할 수 없어 분사(憤死)했던 바로 그 회의다.

제국의 시대를 정리하기위해 모인 열강들은 이 자리에서 선전포고에 앞선 최후통첩을 의무화하는 규정에 서명했다.

그 규정을 준수한 최후통첩의 모범사례는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보낸 편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가 세르비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에게 암살당한 사건과 관련, 세르비아 정부에 책임자 처벌과 관련 단체 해산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48시간이 주어졌다. 세르비아는 마감시간에 맞춰 한가지를 제외한 모든 요구조건을 수용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오스트리아가 조사 과정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요구는 거부됐다. 그로부터 나흘 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다.

최후통첩은 2차 대전 이후 유엔이 만들어지면서 사실상 의미를 많이 상실했다. 유엔헌장과 각종 국제협약 등이 개별 국가 간 전쟁 자체를 불법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위권을 발동하는 경우와 유엔이 결의한 제재는 예외다. 그런 점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18일 최후통첩은 아무래도 제국주의 시대의 형식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21세기 국제질서를 틀 지우는 출발점이란 사실이 아이로니컬하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