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민청학련」국가변란 기획사건 주요피고인별 공소사실요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3면에서 계속>
지시 를받고 74년3윌31일 재입국하여 동년4월2일 전시 조천및 동류인 태두 다시 회합, 1·8대통령긴급조치를 비방한 후 동인으로부터 74년4월3일을 폭력봉기의 시점으로 잡고 서울 및 지방의 각 대학을 중심으로 일제히 폭력 「데모」를 감행할 계획이며 전국민주청년학생총련맹을 조직한 사실등을 설명 듣고 그들의 유인물을 읽어본 다음 그들의 활동자금을 동류 인태에게 제공하고 동월3일 14시경 위 여관에서 동류인태 및 동조천으로부터 민청학련의 유인물인 「선언문」 3장, 「민중의 소리」 3강, 「지식인·언론인·종교인에게 드리는글」일장 도합 8장을 받고, 대통령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자 다시 이를 비방하고 피고인의 위와같은 민청학련과의 직접·간접의 관계를 수사기관에 숨김없이 고지하지 아니하는 등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를 위반하고 전시와 같이 법무부장관의 허가없이 입국자격 이외의 활동을한 자임.
(24)김영일(일명 김지하)(33·시인) 피고인은 "오적" 시사건으로 인한 반공법위반으로 기소되어 현재 미결중에 있으며 "비어"시사건에 관련, 반공법위반으로 기소 중지된 자인바 내란음모죄 전과자인 소송외 조영내와 만나 연내 3, 4월의 학생「데모」에 의하여 현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는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필요하며 이 조직을 위한 자금조달을 피고인이 맡고 위 조영내는 이를 학생조직 책임자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하고 전후4회에 걸쳐 도합 금108만원을 위 조영내에게 2회에 걸쳐 금90만원을, 김은혜에게 2회에걸쳐 금18만원을 제공하는한편, 상피고인들인 이철·유인태·서중석·안재웅 등과 현정부 타도를 위하여 수10차에 긍하여 회합, 내난을 선동하고 이와같은 민청학련과의 관련사실을 정보·수사기관에 고지하지않은 자임.
(25)김효부(21·무직·서울문리대졸)피고인 대학재학시 반정부투쟁「데모」에 주동역활을하면서 반정부지하 신문을 발간한바 있으며 73년12월초 상피고인 이철과 만나 신학기의「데모」를 위한 학생「데모」조직을 결성한 후 전국적으로 일제히 봉기하여 현정부를 폭력혁명에 의하여 전복시켜야 한다는 국가변란계획에 합의하고 상피고인 유인태·동서중석·동리근성·동정문화·동나병식 등과 수10차 회합, 위와같은 계획을 모의하고 권만학·최병두등 10여명을 서울대학의 단과대학의 조직책으로 포섭하고 금년봄 졸업후에도 조직확대를 위하여활동했으며, 동년3월23일 학생「데모」시민중의 봉기를 선동 고취하기 위한 혁명가 "날아가는 까마귀야 시체보고 울지마라"등 도합 13곡의 가사를 상피고인 이량성에게 민청학련의 유인물자료로 제공하는등 내난을 예비하고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여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바 있으며 4·3이후에도 위사실을 수사정보기관에 고지하지 않은 자임.
(26)유근일(37·중앙일보 논설위원)74년1월하순경 상피고인 나병식과 회합, 동인으로부터 민청학련의 국가변난을 위한 폭력 봉기계획을 듣고 현정부 타도는 유혈폭동의 방법밖에 없다고 격려하고 동년2월27일부터 3월9일까지 간에 동나병식과 수회 회합하여 재논의하는 자리에서 언론계의 동향을 설명해주고 동인으로부터 거사시기를 3월말경으로 정하였고 교통량이집중한 종로5가와 신촌및 청량리 대왕 「코너」3개지역으로 나누어 집결하여 폭력으로 경찰저지선을 뚫고 현정부를 전복코자 한다는 정체적인 국가변난계획을 듣고 이를 수사정보기관에 고지하지 아니한 자임.
(27)이지배(30·상록학원강사·서울대대학원재)피고인은 68년반공법위반으로 징역2년에 3년간 집항유예의 선고를 받은외 집회및 시위에관한 법률위반의 전과가 있는 자인 바, 73년10월중 전경부터 대학후배인 서상섭·민청학련의 지도부원인 유인태·나병식등과 접촉하면서 신학기가 시작되는 3, 4월을 기하여 대규모적인「데모」를 감행하여 정부를 전복하여야한 고 내란을 편동하고, 74년2월15일부터 3월23일까지 문에 민청학련의 지도부원인 서중석을 5회에걸쳐 불러내어 시내각처에서 회합하면서 3, 4월을 기하여 전국적 규모의 폭력학생「데모」를 전개하여야 한다는 취지를 역설함과 동시에 폭력수단을 사용하여 투쟁함으로써 현정부를 타도하고 공산주의 정권정부를 타도하고 공산주의정권을 수립하여야 한다고 강력히 선동함으로씨 동인등으로 하여금 국가변란을 목적으로한 반국가단체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결성토록한 사실외에 현정부가 붕괴된 이후의 과도적인 인민연합정권으로 10인협의회를 조직하려고 기도한 사실이 있으며 이상 사실을 정보수사기관에 고지하지 아니한 자임.
(28)정상복(31·한국기독교학생회 총련맹 중부지역담당간사)피고인은 74월8일부터 동월 18일까지 간에 민청학련구성원인 상피고인 나병식과 수차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민청학련의 국가변난 폭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내용을 들은 다음 거사자금으로 금20만원이나 금30만원을 지원하여 줄 것을 요청받자 상피고인 안재웅을 통하여 금 30만원을 수령, 동월18일 남영동 소재 다방에서 동나병식에게 동금원을 교부하고 상피고인 이직경과 공모, 동윌22일 금5만원을 다시 지원하여 내난을 선동하고 대통령긴급조치 4호 선포후 민책학련 구성원인 나병식과의 회합및 자금제공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보수사기관에 고지하지 아니한자임.
(29)이직형(37·한국기독겨학생회총련맹총무) 피고인은 74년2윌중순 공소외 서창석으로부터 유신헌법을 반대, 비방하는 내용의 원고를 받아 기독학생 총련맹발간 「KSCF뉴스·레이다」지에 게재 발표함으로써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동년 3월11일 거주지에서 민청학련의 구성원인 나병식으로부터 민청학련의 국가변난을 위한 폭력봉기에 관한 기본적 계획 내용을들은 후 거사자금으로 금2백만원의 제공을 요청받고 동월12일 상피고인 정상길과 공모, 동일 17시경 신세계5층 다방에서 금5만원을 수교하면서 성공토록 하라고 격려, 내난을 선동 방조하였으며 국가변난의 예비 음모과정에서 민청학련과 직접간접으로 관련되었던 사실을정석보수사기관에 숨김없이 고지하지 아니한 자임.
(30)안재웅(35·한국기독교학생총련맹 호남지역담당간사) 피고인은 73년8월부터 74년3월사이에 한국기독학생연맹사무실에서 민청학련 지도부원인 황인성으로부터 민육학련의 국가변난을위한 폭력봉기의 구체적 계획내용을 들은 후 그 거사자금 5만원의 지원요청을 받아 동월16일부터 19일사이에 동금액을 제공하고 동년3월13일 상피고인 정상복으로부터 민청학련 구성원인 나병식의 폭력봉기 준비자금, 금20만∼30만원의 제공요청사실을 듣고, 동월18일 동금액을 전시, 나병식에게 제공하면서 성공토록 하라고 격려하고 동월26일부터 29일사이 두차례에 걸쳐 기독학생총련맹 전북대학및 조선대학회원 허종현등에게 부활절인 4월11일을기해 일제히 반정부 폭력「데모」를 전개하도록 격려하여 내난을 선동함과 동시,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민청학련구성원과의 회합 기타 민청학련과의 직접 간접의 관련사실을 정보수사기관에 숨김없이 고지하지 아니한 자임.
(31)나상기(26·한국기독교학생회총련맹이사) 피고인은 74년1월30일 공소외서창석가에서 상피고인 이광일등과 회합, 3·4월의 대학가 일제봉기시에 대비, 한국기독학생연맹으로서 위연맹의 강연행사인 신문고 개최를 통하여 반정부운동을 선동할 것을 모의, 동년 2월22일 연사3인을 초빙, 역사적으로 본 일본의 침략주의등을 강연케하여 반일감정을 유발시킨 후 동월27일, 정릉여관에서의 동련맹 서울지구임원회에서 상피고인 정상복과 일반대학의 일제봉기에 대비, 그후속「데모」를 할수있도록 조직을 강화키로 모의한 다음 모교인 숭전대학의조직을 담당하고 동월28일 명동소재 향린교회에서 동이광일등과 화합, 폭력으로 현정부를 타도하기로 모의하여 내난을 음모하고 3월23일, 시내오류동소재 성「미가엘」신학원에서 신입회원 약20여명에게 유신헌법의 반대를 주장하고 동일 상고인 서창석등과 회합하여 4윌11일 부활절을기해 일반대학생을 뒤따라 일제히 봉기하기로 모의하고 동월25일부터 29일까지사이에 지방에 출장, 전남대학 및 조선대학 기독회원 염기열외 7명에게 부활절을 기해 일제봉기토록 하라고 내난을 선동하고 민책학련과의 직접·간접의 관련 사실을 정보·수사기관에 숨김이 고지하지 아니한 자임.
(32)이 철(26·서울대재)
(33)유인태(26·서울대졸) 피고인 이철은 69년7윌 삼선개헌 반대「데모」를 주동한 사실로 피검후 방면되었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자, 동류인태는 71년10월7일 교련 반대「데모」를 주동한 사실로 제적되었다가 복학한 자등으로서 공산주의 사상을 포지한 자 등인바 73년10월2일 학생「데모」이후 유신체제의 폐기를 기도, 교내학생들을 개별적으로 접촉, 포섭활동을 전개하면서, 74년 신학기를 기하여 조직적인 전국규모의 「데모」를 전개하기 위하여 활동하던중 동년12월 중순경부터 시작된 개헌청원서명운동에 편승하여 상호접선하게 되자 각자의 이념과 투쟁목표가 일치함을 인지하고 동월23일, 현정부 타도와 공산정권수립이라는 목적하에 학생폭력 「데모」를 전국에서 일제히 전개하여 민중봉기를 유발시켜 이른바 폭력혁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전국대학은 물론 고등학교를 포함한 전국학생연합체를 구성할 것을 결의하고 그 제1단계조치로서 우선 조직을 강화하기로 합의하고 제2단계조치인 외국공산세력과의 제휴를 위하여 동월24일부터 26일까지 3회에 걸쳐 학생「데모」선동 임무를가지고 입국한 일본공산당원 조천가춘과 재일조총련조직원 곽속의의 지령을 받고 잠입한 일본인 태도 천정수등과 회합하면서 북괴로부터의 무기공급, 일본공산계열과의 제휴, 국제적 여론의 협조등을 주선하겠다는 의사를 확인하고 일본좌익 학생들의 「데모」방법, 조직및 활동 상황동에관한 사항을 교육받는 동시 공산주의 혁명을위한 학생 폭력에대한 선동을받는 일방 동월30일 인혁당 학생지도책으로서 전국적 학생조직을 결성하라는 인혁당의 지령을 받고 상경하였던 중 여정남과 접선하여 동인으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에대한 교양을 받으면서 이에 동조 포섭되어 동인으로부터 폭력봉기를 위한 지하조직의 조직원리인 점조직의 원칙,후속 「데모」를 위한 복선조직의 원칙, 접선의 안전을위한 이중 연락의 원칙, 신속한 조직구축을 위한 침투방법, 중앙과 지방간의 연락책 운용방법등에 관한 교양을 받아 공산폭력혁명 조직구성과 활동의원 이를 터득한후 74년 1월초순부터 피고인등은 서울시내 각대학은 물논 전주·광주·대구·부산·춘천등지를 왕내하면서 전국 각대학에 조직망을 구축하는 한편상피고인 정문화·동나병식·동금병곤·동황인성·동서중석·동안량노·동정윤광·동리근성등과 수차 접선하여 동인등을 포섭하고 동년3월7일위 목적수행을 위한 민책학련을 구성하여피고인 이철은 제1선 「데모」의 총지휘책으로, 동류인태는 제2선 「데모」의 총지휘책으로각 분담하고 동리철은 민책학련을 총괄하는 수괴로서, 동류인태는 제2선 「데모」조직의지도적 간부로서 국가변난을 목적으로 반국가단체를 결성하고 정부를 전복시킨후 공산주의체제로의 이행을 위한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재야각계 용공 및 반정부적 불순분자 천명을 구성원으로한 민족지도부를 구성하기로하고 폭력봉기과정에서 야기될 경찰저지선 돌파를 위하여화염병등을 제조,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공소외 황승주로 하여금 섬광용「마그네슘」·소산가리·「오레인」산등의 각종 화공약품을 원료로 이른바 「말렌코프·칵테일」을 제조케하여 수차의 반복실험을 실시하는한편 상피고인구충서를 고교조직책으로 임명하고 동인이 포섭한 고교학생대표와 회합하여 4·3폭력봉기에 가담할 것을 선동하고 거사일에는 서울시내 각대학 및 학교「데모」를 시청앞 광장에 집결시켜 정부주요기관을 강점하여 정부를 전복시키기로 합의한후, 동년3월27일 전국적으로 배포될 각종 유인물의 인쇄를 위해 정밀인쇄설비와 장소를 마련하고 북괴의 상투적 용어인 『매판족벌』『창부경제구조』『결정적시기에 봉기하라』『반공법 국가 보안법을 폐지하라』 『예비군을 폐지하라』는등 용어를 인용하고 민권 민족 민생등의 용어를 본받아 『민중 민족 민주선언』 『지식인·종교인·언론인에게 드리는 글』『근로대중이여 궐기하라』는 격문·전단·선언문등을 북괴 상·용의 악랄한 문구를 발췌인용하여 작성한 후 위 이근성으로 하여금 위 각종문건 삭만매를 인쇄시켜 동년4월3일까지 전국각대학과 고등학교에 이 박성명귀를 작성하여 그 인쇄와 배포를 모의하는등 내난을 기도하여 국가변난을 목적으로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여 그 수괴로서 활동한 자임.
(34)정문화(23·서울대문리대재)피고인은 73년10월 문리대「데모」사건과 관련하여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었다가 동년12월7일 공소취소로 석방된 자로서 74년1월중순 상피고인 유인태로부터 동리철동서앙석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학생조직으로 정부전복류혈·학생폭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에 적 극가담, 동포력봉기를 주도할 단체를 구성함에 있어 서울대학 담당책으로서 활동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의 지도적임무에 종사하고 동년1월중순경부터 4월3일 전국적인 학생유혈폭동을 목표로 민청학련지도부요원및 시내 각대학대표등 약30명과 함깨 약50여회에 긍하여 회합·내난을 음모하는 한편한민국헌법을 부정·반봉하고, 4·3긴급조치선포이후 4월4일부터 4월6일까지 3회에 걸쳐 동리철 황인성 이근성등과 회합하면서 동조치가 부당하니 반박성명을 내자고 하는등 동조치를 비방하고 동월4일및 5일 양일에 걸쳐 각20분씩 상피고인 정윤광등과 같이 북괴방송을 청취함으로써 북괴활동에 동조한 자임.
(35)김병곤(21·서울대재) 피고인은 73년10윌5일의 서울대상대「데모」를 주동하였던 자로서 평소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반대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지지한 자로서 전국의 학생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폭력적인 「데모」를 강행함으로써 현정부를 폭동에 의하여 전복시킨후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여야한다고 결의하고 74년2윌23일 상피고인 정문화로부터 정부타도를위한 전국적「데모」조직이 상피고인 이철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년3월8일 상피고인 이철 동 황인성등과 만나 민청학련 지고부의 제1선지휘및 서울시내 각 대학의 조직책으로 임무를 부여받고, 폭력혁명을 위한 구체적 방법들을 10차례 모의하면서, 경희대학책 이상희, 연세대학책 송무호 김영준, 성대책 김수길, 서강대책 황민수 박석률, 서울상대책 장원영등을 각대학조직책으로 포섭하고, 74년3월15일 상피고인 장기표에게 「민중의 소리」유인물초안을 작성케하는 일방 4윌3일 봉기시 사용할 각종 유인물초안을 상피고인 황인성등과 함께 수정가필하여 확정한후 공소외 마속동등에게 이의 제작을 지시하는등 내난을예비음모하고,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을 구성, 이의 간부로 활동한 자이며, 4월3일 이후의 고지기 간에 위사실을 수사기관에 고지하지 않은 자임.
(36)황인성(2l·서울대문리대재)피고인은 73년10월 유신헌법 반대 「데모」로 구속된 사실이있는 자로서 73년4월초부터 서울대문리대내에 한국인문화연구회를 조직, 반정부 투쟁을 계속하여 오던중 74년2월 상피고인 이철 등 유인태등과 폭력봉기로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혁명을 하기위한 민청학련을 조직하기로 합의, 지방대학및 서울문리대의 조직책을 맡아 74년4월2일까지 전후 80여회에걸쳐 도합 60여명과 서울·대전·부산·광주 등지에서 접선 경북대·전남대등에 민청학련의 조직을 침투 강화하고 정부 전복을 위한 활동자금으로 도합7만원을 제공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의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고 74년4월3일 민청학련 명의의 『선언문』 『민중의 소리』 등 2천여매를 작성, 살포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74소년4월8일까지 위 사실을 정보 수사기관에 출석 고지하지 아니한 자임.
(37)나병식(25·서울대문리대재)피고인은 73년10월 유신헌법반대 「데모」로 구속된 사실이있는 자로서 동년 9월초부터 주거지에서 북괴의 대남 비방방송을 수회에 걸쳐 청취, 동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하였고, 상피고인 이철 동유인태등이 국가변난을 위하여 민청학련을 조직하고 있음을 알고 74년l월15일이후 수회에 걸쳐 동인등과 접선, 기독교책을 분담하고 4월3일 폭력봉기시 고대·경희대등에 유인물 산포책임을 분담, 그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고 상피고인 유근일로부터는 현정부타도후의 민족지도부 구성을 교시받고 상피고인 이능동·공소외 김영남 동 조영래 등으로부터 민청학련 활동자자금으로 도합 45만원을 지원받고 4월3일 긴급조치가 발포되자 이를 비방하는 반박문을 작성, 이를 가두에 살포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간내에 정보수사기관에 고지하지 않은 자임.
(38)서중석(25·서울대재)피고인은 서울대문리대내의 동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학생「데모」를 주동하였던 사실로 제적되었다가 복학한 자로서, 73년1월초부터상피고인 이철, 동 유인태, 동나병식, 동 이근성, 동 안량노등과 수차 접선하여 4월 폭력봉기를위한 전단계적 조치로서 학생조직을 강화하기로 모의하고, 상연학원 강사인 상피고인 이현배와 5회에 긍하여 회합면서 동인으로부터 조직적이고도 전국적인 규모의 학생「데모」·유혈「데모」를 전개하여 폭력혁명의 과정을 거쳐 정부를 전복시키라는 선동을 받고, 각자의 부서책임을 제안하여 정부타도를 위한 제1선 및 제2선「데모」지도책임자를 결정하여 피고인은 선후배관계 연락원으로서 이철을 보좌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조직을 완성함으로써 내난을 기도함과 동시에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의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면서 동월29일까지 동 민청학련의 조직확대를 위하여 고대등 타대학의 학생포섭활동을 계속 하였으며 민청학련과의 직접·간접의 관련사실을 정보수사기관에 숨김없이 고지하지 아니한 자임.
(39)안량노(25·서울문리대정치과4년재)피고인은 73년10월 서울문리대학생「데모」를 주동한 자인바 평소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반정부활동을 전개해오던 중 동년12윌하순경상피고인 유인태와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현정부 전복을 목적으로한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결성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되자 즉각 이에 가담할 것을 약속하고 폭력 「데모」조직에 학생뿐만 아니라 노동자까지 가담시키자고 제의하고 제1선「데모」가 실패할 경우 후속「데모」를 전개할 수 있는 제2선 조직을 담당할 것에 합의함로써 내난을 음모하고 74년1월초순부터 동년3월초순까지 10여회에걸쳐 상피고인 유인태등 10여명과 접선하고 「데모」시사용할 유인물 자료를 수집하고 화염병 제조방법을 연구하는등 내난과 반국가단체 구성을 음모하고 동년3윌7일 민청학련결성시에 피고인은 제2선 행동총책으로 선정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여 그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고 동월하순부터 동년4윌2일까지 전후6회에 걸쳐박정식등 10여명과 접촉하여 동인등을 제2선 조직에 포섭합으로써 민청학련의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행위 사실을 동년 4월8일까지 정보수사기관에 출석, 고지하지 아니하고 동년4월6일부터 동4월12일까지 전후16회에 걸쳐 상피고인 일철등 11명과 회합하고 제2선 조직을위한 대금을 갹출하고4·3조치철회를 요구하는 반박성명발표를 위한 등사기를 구입하는등 민청학련의 활동에 관한 문서제작을 예비한 자임.
(40)이근성(24·무직·서울대문리대졸)피고인은 71년5월경 집회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죄등으로 현재 서고등법원에 사건 반속중에 있고, 73년10윌2일 서울대문리대 「데모」를 주도한 자인바 동인은 74년1윌말경 피고인 김효순등이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폐중임을 지득후 이에 동조, 포섭되어 민청학련의 구성원인피고인 이철 동 정문화 동 나병식 동 유인태 동 김효순등과 회합 모의하는 한편 피고인은 동 민청학련 지도부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74년3월 상피고인 이철로부터 제2선 요원으로서 유인물 담당책의 임무를 부여받고 이를 응낙한후 서울도봉구방학동에 세방을 얻고 유인물 등사실을 마련한후 비정백서등 유인물제작 자료를 각처에서 수집하여 공소외 마동훈등 4명을 보조원으로 활용 상피고인 이철 동 김병곤동 김효순 동 황인성등이 초안하고 수정가필한 원고를 가지고 동년 3월부터 동년4윌까지 선언결의문 민중의 소리 혁명가등 노래가사 경희대 선언문을 등사하여 이를 전시 이철 동 김병곤 동 황인성 동정문화 공소외 송운학등에게 배포하여 각자 분담별로 각대학및 시중에 살포토록 하고 1974년4윌3일 거사에 실패하자 은거하면서 전시 이철 동정문화 동 황인성등과 계속 회합하고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에 대한 반박성명의 필요성을 확인하고 이를준비할 책임을 진후 동월6일 공소외 정찬룡을 만나 4·3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내용의 반박성명초안을 작성하여 주고 등사를 의뢰하고 상피고인 안량노와 회합, 계속 전시 반박성명 등사작성을 모의하고 서울동대문구답십리동 소재 성명미상 인가에 등사시설을 하고 등사활동을 계속한 자임.
(41)정윤광(27·서울대 문리대재)피고인은 73년12윌초순부터 동월말경까지 사이에 수회에긍하여 서울대 구내및 부근 다방등지에서 상피고인 이철과 회합, 이철의 고문역할을 받아 활동합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의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고 74년1월하순경부터 동년4월3일 전국적인 유혈학생폭동을 목표로 약30회에걸쳐 시내각 대학대표 약20명을 포섭, 내난을 음모하는한편 대한민국헌법을 부정 반대하고 4·3긴급조치 선포이후 동년4월4일부터 4월6일까지 3회에걸쳐 동리철·정문화등 민청학련 구성원들과 회합하면서 동조치에대한 반박문을초안, 각자 인쇄하여 철포할 것을 모의하는등 동조치를 비방하고 민청학련관련사실을 정보수사기관에 고지하지 않고 동년4월4일및 4월5일 양일에 걸쳐 각20분간씩 상피고인 정문화등과 같이 북괴방송을 청취함으로써 북괴활동에 동조한 자임.
(42)강구철(20·서울대문리대재)피고인은 충남북의 대학교조직및 서울대 문리대 연락책임을 담당하여 74년4윌2일까지 전후50여회에 걸쳐 도합30여명과 접선,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을 구성하여 그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고 73년4월9일 민육학련명의로된 4·3조치 철회요구 반박문 900장을 작성하여 이를 살포함으로써 민청학련의 활동에 관한 문서를 제작 배포한 자임.
(43)구충서(19·단국대재)경기고등학교등 시내고등학교학생회 간부등을 선동하여 각고교조직책을 포섭하고, 위 이철로부터 민청학련의 유인물인 「민중·민족·민주선언」「민중의 소리」「지식인·언론인·종교인에게 드리는 글」을 수령하여 위고사대표들에게 배포한 자임.
(44)이강철(26·무직·경북대졸)경북대 연락책으로서 충남 조치원읍, 부산시 구포등지를 내왕하면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련맹의 서울대책 황인성 동전남대책 윤한봉등과 접선 회합을수시 갖고 4윌3일 폭력봉기의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3월21일 경북대의 반정부 「데모」를 주도.
(45)정화영(26·경북대재)신학기인 4월4월경 전국 각대학생들이 일시 다발적으로 폭력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하기로 모의하고, 동년 2윌27일 영남대생 김재규등을 각접선하여 민음학련 동대학 행동책으로 포섭하고. 동년3월18일 대구시남구 대명동 소재 다방에서 동려정남으로부터 경북대 반독재 민주구국투쟁위원회 명의로된 반독재민주구국 선언문 초안을받아 동월20일 주거지에서 동림규영과 함께 이를 2천장 복사한 후 동월21일 경북대생 공소외 황철식, 동 장성백, 동 강기룡등과 공모하여 경북대내에 동유인물을 살포하고 동월22일 대구상고와 경북사대부고 교정에 동유인물 각21장씩을 철포한 자임.
(46)임규영(21·경북대재)피고인은 74년2월10일 경북달성군성서면 강창나루터에서 노농배급의 이점을 대변할 수 있는 정권의 수립을 위해 현정부 전복유혈학생폭동을 계획하고 이를주도할 조직을 구성중에 있던 상피고인 유인태등 서울대대표와 접선하여 동조직의 경북대연락책으로 활동할 것을 결의하고, 74년2월24일부터 4∼5회에결쳐 대전 속리산등지로 전전회합, 모의하는등 반국가체제인 민청학련의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는 한편 동년 3윌21일 경북대 「데모」를 주동하기위해 전후 10여회에 걸쳐 상피고인 정화영 동 이강철등 10여명과 회합, 내난을 음모한 자임.
(47)김정길(22·무직)74년2월15일19시경 광주시소재중앙다방에서 상피고인 나병식으로부터 현정부타도를위한 전국적 학생유혈폭동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동한후 민청학련의 호남지역책을 선정, 소개해줄 약속을하고 동년3월1일 동조직을 구성중에 있던 동황인성에게 상피고인 윤한봉을 접선시켜주어 반국가단체의 구성을 음모하고 위 윤한봉 및 공소외 김상윤등을 접촉하면서 전남대「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내난을 음모하는 한편 대한민국헌법을 행정·반봉·대통령긴급조치1호를 비방하고4· 3 긴급조치 선포이후에도 전남대학생 「데모」를 선동한 자임.
(48)이강(26·무직)피고인은 74년4월14일 광주에서 민청학련 호남지방대학책인 상피고인김정길에게 전남대 「데모」 사건으로 너와 내가 수사기관의 수배를 받고있으니 빨리 피신하라하면서 도피자금조로 금6천원을 동인에게 제공함으로써 민청학련 구성원인 동인에게 편의를 제공한 자임
(49)윤?봉(25·전남대재)민책학련을 구성 그지도적 임무에 종사하고, 전남대내 동조세력을규합, 전남대「데모」를 주동하하는 등 내난을 음모 예비하고 4·3조치선포 이후에도 전남대 「데모」를 계속 주동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반대하고 긴급조치 4호를 비방하는 유인물을살포한 자임.
(50)김승애(26·연대재)피고인은 민청학련의 연대책을 맡아 유혈폭동봉기로 현정부를 전복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을 모의한 자임.
(51)송무호(22·연대재)피고인은 연대내「서클」인 동곳회 회원으로서 동곳회가 핵심이 되어 교내 타「서클」을 포섭, 타대학과 유기적인 연락을 갖고 신학기에 폭력봉기로 현정부를 전복하기로 모의하고 금년2월21일 민청학련의 지도부원인 상피고인 유인태, 동정문화, 동황인성등과 회합하고 정부를 폭력으로 전복시키기 위하여 전국학생폭력 「데모」조직을 구성하기로 모의하고 동연대 책임자로서 동민주학련의 지도부원인 상피고인 김병곤과 전후 수회에걸쳐 회합, 현정부를 폭력으로 타도한 후의 과도정부 수립을 모의하고 금년 4윌1일 연대강당에서 약2천여명의 학생들이 예배보는「채플」 시간을 이용, 학생의 반정부「데모」를 선동한 자임.
(52)김수길(20·성균관대재)피고인은 74년3월에 민청학련지도부 요원인 상피고인 이철동김병곤 동정문화와 각 회합하고, 모의한후 민청학련 성대조직책으로서 성대조직을 완료하고74년3월29일 경기도 고양군 금곡사능의 민청학련 대표자 회의에 참석, 폭력혁명방법의 기본방침을 모의확정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구성하여 그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고 민청학련 및 성대선언문등 인쇄물을 준비하는등 74년4월3일 성대「데모」를 주동함으로써 내란을 예비 음모한 자임.
(53)여경석(27·무·서울대공대졸)현정부타도를위한 전국적폭력 「데모」의 활동및 민청학련의 구성 조직자금으로 금9만원을 제공하였고 74년1윌14일 공소외 강영원 (제일교회 대학생회회장)에게 한국기독교학생회총련맹(KSCF)·YMCA·YWCA·교회청년연합회등을 망라하여 범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 유신헌법반대및 긴급조치 철폐운동을 전개하라고 지시하였고 73년12윌중순부터 동년 4월4일까지 상피고인 나상기 동리광일 동가인성등과 전후 9회에 걸쳐 접선, 폭력 「데모」를 격려설득선동한 사실이 있고 74년4월7일 민육학련 구성원인 황인성에게 은신처를 알선한 자임.
(54)이광일(24·한국신학대학1년중퇴·전교회청년연합회회장)3·1절 예배후 일본상품불매운동을 구실로 반정부 「데모」를 감행 폭력으로 현정권을 타도하기로 획책하여 내란을 선동하고 74년1월18일 공소외 김형기가 유신헌법반대및 긴급조치절폐를 목적으로 기독학생33인을 규합, 단식투쟁 및 가두시위를 하자는 제안을 받고 이에 동조한 자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