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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을 폭행으로 둔갑시킨 어이없는 경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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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야이 XX야, 나 출근 못하면 책임질 거야!”

지난 23일 오전 8시40분 연수를 받기 위해 서울 지하철 중랑역에 내린 중학교 교사 손성훈(34)씨는 60대 노인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김모(26·휴대전화 판매원)씨를 보고 가던 길을 멈췄다. 노인들은 부정승차를 단속하는 질서지킴이 유승현(66)씨와 임기택(66)씨였다. 이들은 김씨가 개찰구에 카드를 찍었을 때 부정승차 표시가 떠 확인을 요청했다. 그 순간 김씨가 유씨를 밀쳐 바닥에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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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다 못한 손씨가 김씨를 제지했다. 그러자 김씨는 손씨를 뿌리치고 역 밖으로 도망쳤다. 손씨는 남성을 뒤따라가 붙잡았다. 마침 연수원으로 향하던 중학교 교사 신성현(43)씨가 이 모습을 보고 112에 신고했다. 김씨는 본인의 옷과 짐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손씨의 가슴팍을 강하게 밀쳤다. 잠시 뒤 중랑경찰서 중화지구대 소속 경찰 2명이 출동했다. 경찰관을 보자 김씨는 손가락을 부여잡고 통증을 호소했다. 두 교사는 소속 학교와 연락처를 남긴 채 연수원으로 향했다. 연수원에 도착한 지 5분 후 손씨는 중화지구대로 출석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두 교사가 지구대에 들어갔을 때 질서지킴이 유씨와 임씨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김씨가 집단 구타를 당해 손가락이 골절됐다고 4명을 고소한 것이다. 지구대 소속 이모(40) 경위는 이들에게 “미란다 원칙 아시죠. 여러분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라고 말했다. 신씨는 황당한 소리에 강하게 항의를 했다. 하지만 “경찰서에 가서 얘기하세요”라는 답만 돌아왔다. 손씨는 “현행범 체포확인서에 서명을 거부했더니 빨리 서명할수록 유리하다는 말만 반복해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 시간 후 이들 4명은 중랑경찰서로 연행돼 형사과 피의자 대기실로 들어갔다. 허리 높이의 쇠창살로 막힌 차가운 마룻바닥이었다. 담당 형사는 두 교사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됐으므로 소속 학교에 이 사실을 통보하겠다”고 말했다. 손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마룻바닥에 주저앉았다”며 “좋은 일을 하려다 내 인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신씨는 아는 변호사에게 전화로 부당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담당 형사와 변호사 간 언쟁만 높아졌다. 형사는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우리식대로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항의가 이어지자 중화지구대 소속 이 경위가 두 교사를 찾아와 현행범 체포를 임의동행으로 바꿔주겠다며 ‘임의동행동의서’를 내밀었다.

 오후 2시 피의자 조사를 받고 나온 손씨는 중랑역을 찾아 인근 상점의 CCTV를 확보했다. 화면엔 손씨가 김씨를 붙잡고 오는 장면과 김씨가 본인의 옷과 물품을 내던지며 손씨의 가슴을 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봤던 인근 상점 주인은 “교사는 20대 남성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옷만 잡고 있었지 큰 몸싸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지하철 지킴이 유승현씨는 “김씨의 힘을 못 이겨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와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며 “주변에 경찰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는데 오히려 내가 현행범 피의자가 됐다니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당일 저녁 중랑경찰서관계자는 손씨에게 “CCTV를 확인해 보니 선생님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잘못된 체포였다”고 잘못을 시인했다.

다음날 경찰서에 온 김씨는 병원 진단서도 제출하지 않고 조사를 거부하며 자리를 뜬 뒤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는게 경찰 측 설명이다. 이에 대해 김씨는 “멱살잡이를 하고 상대를 강하게 밀치는 과정에서 손가락이 탈골됐다”며 “한 차례 조사받은 뒤 지금까지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26일 두 교사의 집에는 중랑경찰서에서 보낸 체포구속통지서가 발송됐다. 이 경위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당시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물건이 널브러져 있고 김씨가 소리치며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해 손씨 등을 현행범으로 체포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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