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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제13화 신석항에 서린 은수 천년(2)|제3장 동북지방의 한적 문화 탐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국」과 「조선」의 혼동-.
우리에겐 가히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큰 차가 있는 이 낱말들을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명확히 분간치 못하고 있다. 아니, 대다수 일본인들은 한반도 전체를 여전히 「죠오셍」이라 부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 일본인들에겐 해방 후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혹한 정치현실이 제대로 실감되지 않고 있는 탓이라고 선의의 해석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 대다수 일본인들의 의식구조 속에는 아직도 일제시대 이래의 대조선관이 그대로 온존돼 있는 증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재등경부와 이 같은 말을 주고받고 하는 사이, 옆에 있던 한 경찰관은 대단히 무안한 듯, 멋 적은 웃음을 지으면서 흑판을 북북 손으로 문질러 「선박 국적」난에 적혀 있던 「조선」을 「한국」으로 바꿔 써 놓았다. 이를테면, 한국 배가 그 본래의 국적을 되찾은 셈이 된 것이다.

<한국계 조신 모신 신사>
각설하고, 그러나 북송선이 떠나는 단장의 항구, 이 신석과 한반도와의 관계는 작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 일본 연안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상고시대 이래 적지 않은 인연이 맺어진 것인데 그 단적인 증거 한가지가 이 신석시 한복판에 있는 백산 신사이다.
일본 제1의 큰 강「시나노가와」를 끼고 총면적 1만5천평방m나 되는 넓은 경내를 가진 이 신사는 지금은 백산 공단이라 불려져 시민의 놀이터가 돼 있지만, 그 연고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 신사 역시 한국계 조신을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통 분홍색 철쭉꽃과 연꽃에 덮인 연못가를 돌아 사무소를 찾아갔으나 궁사는 출타 중이라 만나 볼 수 없었고, 다만 신사의 유래를 적은 소책자 하나를 얻어 펼쳐 보았다. 제신은 그저 「국리원」라고 만 돼 있어 약간 실망했지만 이 제신이 한국계라는 것은 곧 알 수 있게 되었다. 도시 백산 이란 한국 고어「??」과 관련되는 것인데다가 백산·백천 또는 백산신사·백학신사 등「백」자를 붙인 것들의 분포는 상고시대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천신만고 끝에 일본기내로 들어가던 왕시의 이동경로와 일치하는 곳에만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일본 일대의 지도를 다시 한번 펼쳐 볼 필요가 있다. 앞서도 여러 번 언급한바와 같이 아득한 옛날부터 한반도 동해안에서 배를 띄우면 하루를 타고 저절로라도 이 일본 연안 각지에 도달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그 배들이 닿은 고장마다에 옛 한반도와의 인연을 암시하는 많은 사적들이 남아 있는 것이지만, 이「백」자의 분포상황이야말로 흥미진진한 얘깃거리의 소재이기도 한 것이다.
산명·천명·지명 또는 신사 명에「백」또는「백산」이란 이름을 붙인 것들의 동쪽 상한은 바로 이 고장 신석요, 그 서쪽 하한이「하고로모」선녀전설(=후술)로 유명한 경도 북쪽 비파호반의 마을「여오」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연안∼경도 잇는 「백」자>
모두 동해(일본 해)에 면하여 서로 접경하고 있는 신석현·부산현·석천현·복정현 등 중부 이일본 북륙 연안에는 이 고장 신석시 말고서도 출운기·백기·직강진·계어천(이상 모두 신석현)·부산(부산현)·주주·부내·우작(이상 석천현)·삼국·돈하·금건(이상 복정현) 등 등, 가는 곳마다에 일본 건국신화와 관련된 한국계 조신을 모신 신사와 전설·전승들이 깔려 있지만 유독 이「백」자를 붙인 지명이나 신사들이 이 연안 도시들과 경도를 연결해 주던 옛 통로, 즉 천첩 산중을 뚫고 사람들이 오가던 길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신석시의 백산 신사로부터 그 동남방 90여km 선견계곡 근처의 백산(표고1,012m). 석천현과 지부현과의 현계 근방의 백산(표고2,702m=백산국립공원), 백산비양신사(금택 남방30km) , 기부현의 백천, 능곽 백산(표고1,6170, 복정현의 평천사(월후백산신사), 백학 신사(금장 근처)등 등이 모두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이 통로는 이 일본 연안에 상륙한 도래인들이 월후 산맥·비역 산맥·목주 산맥 등 험준한 산줄기를 넘고 또 신농천·천곡천·목증천·신통천·구두룡천 등 급류를 헤치면서 천신만고 끝에 일본의 중심부, 즉 기내로 들어가던 길이었던 것이다.

<한국 고어 「??」과 관련>
기내를 바로 지척에 두고 있는「쓰루가」에 착륙한 집단은 예외였지만, 그 위 신석현·부산현·석천현의 각 연안에 착륙한 도래인들이 그 일족 낭당들을 거느리고 당시의 일본 중앙 대화 지방에 도달하기까지에는 몇 년이 걸렸을 것이며, 따라서 이 험로의 구석구석에 두고 온 고향의 「??」과 관련된 이름을 남겼던 것이다.
복정시에서 동북쪽으로 10km, 자동차로 약1시간 거리에 있는 승산시 평천 사가의 백산 신사를 찾아 그 궁사 평천 황씨를 만났다. 그는 대대로 일본 황실의 시강을 지내온 구 귀족 출신으로 현재는 국악원 대학 교수를 겸하고 있어 이 신사 제신의 한국계에서는 펄쩍 뛰었다. 그렇지만 이 신사의 보물전에 봉안돼 있는 족자엘 보면 이 신사와 한국계 도래인들과의 인연을 부인할 수 없다.
월후 백산 신사라 불리는 본래 양로원년(717) 태징 대사가 창건한 백산 평천사였으나 명치 이후 신불습합의 금지령 때문에 현재는 신사가 돼 그 유물들을 보물전에 두고 있다.
그런데 거기 수장된 신불혼효(혼희)시대의 족자에는 이 신사의 제신이 분명히 천조황태신·팔번대보살·춘일대명신 등 3위로 돼 있어 그 신들의 한국과의 인연은 의심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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