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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음으로 맞은 망부 24년|납북 박열씨 사망…서울의 미망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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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동경=박동순 특파원】6·25때 납북됐던 항일투사 박열(본명 박준식)씨가 17일 상오 1시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18일 평양 발 신보도가 전했다. 금년 73세.
경북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태생인 박 의사는 1923년 9월 일본황태자 유인(현천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소위 「대역사건」으로 일경에 검거돼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된 후 22년간의 옥살이 끝에 8·15해방과 더불어 풀려 나왔다.
그 뒤 조총련에 대항하여 재일 거류민단을 조직, 초대단장에 취임했었으며 49년 귀국했었다.

<"허물어진 기다림">
항일투사 박열 의사가 납북의 사슬을 벗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쳤다는 북에서의 부음을 받은 서울의 미망인 박의숙 여사(56·본명, 장의숙)는 조용히 오열을 삼켰다.
『북에라도 살아 계신다면…』하던 한 가닥 기다림으로 버텨온 24년. 이제 그 기다림마저 허물어지고 유해 없는 빈소를 마련했다.
여사가 박 의사와 결혼한 것은 해방직후인 47년. 동경여대 일어과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일본 국제신문기자로 근무하다가 출옥1주년을 맞은 의사를 인터뷰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박 의사가 「프로포즈」, 곧 결혼했었다.
의사는 47세, 여사는 29세였다. 박 의사는 이때 초대 거류민단장 직을 맡고있었다. 결혼 1년만에 맏아들 영일씨(27·육군중위)를 낳았고 이어 맏딸을 얻었다. 항일투쟁과 옥중생활로 이어온 의사에겐 난생 처음 맛보는 가정의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의 즐거움도 단 3년뿐. 49년 고국에 돌아와 신혼살림을 차렸다가 이듬해 6·25가 터지고 의사는 북한군에 피납,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다.
박 여사는 의사 피납 뒤 살길이 막연해 이듬해 다시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었다. 그 뒤 맏아들 영일군이 일본 아쓰기(신나천현 후목) 고교를 졸업할 무렵, 뜻밖에 북의 의사로부터 「영일이를 서울로 데려가 공부시켜달라」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길로 박 여사는 영일군을 데리고 육사에 입교시켰다.
여사는 영일군이 임관된 이듬해인 72년 귀국했다. 마침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된 해여서 여사는 평양회담을 취재했던 조총련계 기자로부터 평양에서 의사를 만났다는 소식을 우연히 전해들었고 이것이 의사에 관한 두 번째 소식이자 마지막 소식. 여사는 현재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월세2만원 짜리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영일씨의 뒷바라지를 하며 일본어 강사 등으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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