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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1)"민족 정기에 살으렷다"|이 한해를 사는 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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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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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이 노래는 청산별의 첫머리 귀절이다. 고려 때 학문의 깊이도 문화의 수준도 대단했을 어느 시절 세상을 개탄하는 어느 한 선비의 노래였을 것이라 전한다. 혹은 짝사랑의 애달픈 정을 뇌까린 것이라고도 한다. 노래의 전편에는 시속을 떠난 밝고 소박한 기풍과 호탕한 기개를 간단하고 명쾌하게 나타내었다. 노래의 중간에서 한숨을 돌려 「살어리 살어리랏다\바 래(바다에) 살아리랏다」고 한데 이르러서는 높고 무거운 청산의 미담과 아울러 바다의 가없이 늠름한 흐름 위에 애 타는 심사를 미련 없이 띄워 보내는 정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 노래에는 내장산, 내 국토를 아끼는 그윽한 정이 스며 있음을 볼 수 있다. 내 강산에 태어나 그 산천의 정기를 마시며 인간 정기를 길러 왔거든 청산별곡에서 인간이 나아가야 할 순수하고 떳떳한 길을 청산과 바다에 다짐코자 했음은 바로 내 강산의 대자연을 거울삼아 어버이의 옛 교훈을 가슴에 되새기는 일과 같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노래를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보고자 했다.
살으리 살으렷다.
민족 정기에 살으렷다.
이는 오늘의 어지럽고 어려운 역사적 현실을 어떻게 해서 올바르게 헤어나가 민족·국가의 본래 목적을 크고 미덥게 발전시켜 나간 것이냐 하는 것을 묻는 뜻에서 「어즈버 민족 정기에 살으렷다」고 외쳐 보는 것이다. 혹시라도 오늘 이 때 민족 정기를 외쳐야 할 연유가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나로서는 이를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판결을 받을 것을 각오하면서 준엄히 일러준 영원한 교훈의 한마디로 대신코자 한다. 그는 당시 민주 정치를 대표하던 「아테네」의 시민 다수가 참여하고 있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친애하는 「아테네」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그 지혜와 용기와 또 위대한 업적은 쌓아 올린 것으로써 이름 높은 「아테네」의 시민이면서 재물과 권세와 지위와 명망에만 눈이 어두워져서 지혜와 진리를 사랑하며 당신네들 자신의 정신을 바른 길로 온전히 닦아나갈 것을 생각지 못하고 있음을 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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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유와 그 의지의 독립 없이는 이 국가의 떳떳한 발전을 도모하기 어려운 것이다. 국민의 애국심의 계발은 사회 공동체-민족 공동 운명체의 대의에 입각하여 그 사회의 이익을 위한 공동목표를 뚜렷이 내세우고 모든 국민이 기꺼이 희생 봉사할 수 있는 협동 정신을 발휘하게 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 있다.
독립된 개인의 자유의사가 그대로 국가 목적에 투철할 수 있는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바로 공산독재 국가가 공산당 이외의 어떤 주의 주장도, 또 어떤 반대 토론도, 의문도 용납치 않는, 「공산」하나 뿐의 강대한 권력체제와 근본적으로 바탕을 달리하는 점이라 할 것이다. 저들에게서는 인간 개인의 존엄과 자유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으며 모든 인민은 공산당의 독재체제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동원되는 복종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면 공산당은 무엇이고 저들이 항상 외치는 「역사의 필연성」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여기서 공산당을 비롯한 모든 독재·독단의 체제 그 자체가 자신의 의문을 빚어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사회 밑바닥에 이기심 판쳐>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의 형편은 어떠한가. 지난번 예산 국회도 끝판에 가서 정부에 대한 건의안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즉 사회의 어떠한 부조리도 배제할 것, 민주적으로 서정을 쇄신할 것, 언론은 자유롭게 창달되어야 할 것 등등 극히 막연한 듯 하면서도 사회정세에 못 마땅한 실정을 전면적으로 규탄코자 하는 내용인 것이다. 여기에는 국회가 무능한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전제 아래 정부 당국의 정치적 자각과 시책의 혁신을 촉구하는 뜻이 내포돼 있다. 사회의 부조리가 한 두 가지도 아닌 「모든 것」으로 표현된 그 내용에는 정계를 포함한 사회 모든 분야에 쌓이고 쌓인 부정부패, 정부 당국과 관료들의 민생과 민의를 외면한 독선·독단 및 재정의 낭비 등으로 배제하자는 데서 민주적 서정쇄신을 내세운 것으로 안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와 창달에는 신문의 보도나 논평이 정보기관의 간섭 때문에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극히 부자연하고도 가련한 형편을 구제하여야겠다는 뜻도 있겠지만, 언론 억압에 의한 국회의 기능 위축도 지적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건의서가 국회에서 나오기까지에는 대학생들의 계속적인 「데모」에 자극된 바도 크다 하겠으나 건의안을 본회에서 통과시킬 때 발의의 책임자인 야당의원들이 한 절반 떨어져 나가고 여담 측이 표결의 다수를 차지했다는 점은 공화당에서나 유정회가 자신들의 정치적 불만을 더 크게 표시한 결과가 되었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표면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오늘의 사회 밑바닥을 흩어보면 거기에는 물욕-이기심이 판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기심의 팽창은 모든 패륜과 악덕의 근원인 것이다. 해방직후의 정치·사회 경제의 혼란과 6·25의 처참한 전란을 겪어야 하는 동안 아무 것도 없이 먹어야 살겠다는 절박한 기근과 공포 속에서 이기심은 한층 조장된 게 사실이다. 그 당시 양심을 보살피며 인정을 말하기 어려웠었던 형편이 태반이었는데 그후 이기심은 모든 혼란 속에서 날로 팽배하여 왔다.
그래서 단순히 저만이라도 먹고 저만이라도 잘살아 보자는 최소한도의 자기 보존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굶기고라도, 이웃을 손해보고라도, 법을 어기고라도, 국가의 면목을 헐고, 국민의 손실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국가 권력과 법과 제도가 모두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최대한으로 이용거리가 될 것을 전제로 하는 한편 반대로 사회 정의를 외치는 따위는 무능력의 잠꼬대로 보게끔 되면 사회의 부정·부패·불법은 더 말할 나위 없으며 사회의 도의란 땅에 떨어져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치마저 민주주의의 간판 밑에 다수를 빙자해 폭력화하고 권력과 지위란 것의 권위의식은 부정·불법의 수단처럼 되기가 일쑤임을 많이 보아왔다.
근래에 와선 산업 건설이 급속도로 발전을 보이며 국민의 생활수준도 현저히 향상돼 왔다. 수출 실적도 상당히 늘어나고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널리 받아들일 신용도도 높아가고 있다. 이는 주로 국가의 공업화를 주안점으로 하는 사회 근대화의 작업이다.
비록 외국의 빚더미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어려움이 적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역시 역사는 발전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가 크게 경계하여야 할 것은 경제 건설의 전문적 문제에 뿐 아니고 이러한 경제 건설에서 오는 돈·물자·기술·공장·수출·생산 등등, 온 사회가 돈벌이 위주로 기울어지는 점이다. 생산의 확대에 앞서 소비와 유행부터 따르고 생산의 향상은 사치와 낭비와 향락에 치우쳐 이 사회에 퇴폐 풍조가 날로 높아가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신의 빈곤서 오는 불균형>
부자는 더 부해지고 가난한 자는 상대적으로 가난이 더 심각해 간다는 비난도 아니 나올 수 없고 그 배경에는 국가의 혜택을 누구나 왜 더 입어야 하느냐하는 불만 불평도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은 급격한 발달을 보는 사회에 으레 따르는 어떤 과도적 역현상이라고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풍조가 물질에만 더 혹하여 대부분의 국민이 돈과 장삿속에만 눈이 팔려 버린다면 앞으로 사외 도의심의 타락을 구제할 길이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물질면의 부강을 자랑할 수 있는 반면에 정신면의 빈곤과 허탈에서 오는 사회 불균형의 병적 증상을 나타내기도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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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들에게서 민족의 양심이 말라 버릴 수는 없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 속에 값진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는 영원을 약속하는 민족의 생명과 더불어 민족의 긍지가 우리 가슴속에 깊이 또 굳세게 살아 있는 것이다. 민족 양심의 등불, 민족 정기의 심지는 아무리 어지럽고 어둡다 해도 이 사회에 광명을 던진 것이다.
혹시는 민족 정기란 것을 대외적으로 표시되는 적대감정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 해방을 맞아, 일본의 혹독한 침략지배하에 노예 이상으로 저들의 학정에 시달려온 우리들은 「일제잔재」라는 말로 거의 반세기 동안의 묵은 때를 하루바삐 닦아내려 했고, 나아가 민족 본래의 제 정신을 되찾아야겠다고 한 때 「민족정기」를 외친 까닭이다.
그런 경우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민족의 적대 감정이 깊이 스며있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지금도 우리들사이에 일제의 더러운 때를 씻어내지 못한 점을 지적하여 민족감정에 호소하며 그 수치를 닦아내야 할 것을 다짐하지 않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아직도 우리들 사이에는 간혹 가다가 일본말을 빌지 아니하면 우리의 의사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일본말을 낱말일 망정 함부로 쓰면서 『그것도 외국어니까요』하는 식으로 변명하기도 한다. 그 옛날 일인들이 우리 민속을 말살을 꾀하고 그 첫 수단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말부터 못하게 하고 우리네 이름 석자도 제대로 유지치 못하도록 창씨개명을 강요했던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우리 입에서 일본말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근래에 일본과 온갖 거래가 잦아지면서 저들의 상품과 자본과 관광객이 밀려드는 통에 무슨 「친선」이란 이름아래 서로 잘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본다. 친선도 좋고 또 벌어먹기 위해서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나 사람은 제 분수를 가리고 제 체면을 떳떳이 가져야 할 것이다.
민족 정기란 말은 민족정신, 특히 민족 감정이란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감정」이란 말은 결코 누구 앞에 낯을 붉히는 따위가 아니다. 순수한 마음의 극히 자연스럽고 발랄한 표현에서 인간 개인의 존엄과 개성을 바탕으로 자유 의사의 백화만발을 볼 수 있는 마음의 호수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 정기가 민족의 감정에서 민족의 의지로 발전하는 자취를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의 창조력을 통해 찾을 수 있을 줄 안다.
대개 민족이라고 하면 인간의 생리적 면에서 피의 갈래를 더듬어 올라가야 할 것이나 그것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서나 그 아득한 생성의 과정을 쉽게 찾아낼 길이 없다.

<일체감과 동질성의 기반>
그보다는 민족의 건군신화를 더듬는데서 민족의 자기 발견을 그 출발의 기점으로 삼는다. 우리에게는 단군시조의 신화로부터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의 설화 또는 신라의 박혁거세 시조의 설화 등이었다. 모두 북방에서 흘러온 것이고 또 하늘에서 강림한 단군의 먼 조상이나 하늘로부터 용감하여 잉태되었다고 하여 대개 같은 계통 종족의 유포임을 짐작케 한다.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하고 오랜 산 기록이 고구려의 광개토왕 비문이요, 고구려는 북쪽의 부여(북부여)에서 갈려 나왔고 그에 앞서 북방에 고리국이란 것이 있었다고 쓰여 있다. 이들 기록은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발상이 오늘날의 역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연대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민족발상과 건국의 신화를 가졌다는 것은 이미 그 어느 시대 이전부터 원시 공동체를 이룩하여 민족의 생명체, 그것을 곧 민족생존의 목적으로 하고 저 북반구(만주)로부터 만주 일대와 한반도 및 중국 내륙의 산동성에까지 종족의 갈래가 널리 퍼지거나 또는 영향을 널리 끼쳤던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런 가운데 북방 고구려의 생존의 역사는 가장 쓰라린 것이면서도 가장 혁혁하고 생생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지혜롭고 슬기로우며 굳센 그들의 의지는 북방 여러 종족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하고 압록강 연안 환도와 국내성으로부터 지금의 평양으로 옮겨가며 대동강 유역의 비옥한 땅 위에 찬란한 문화 유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것은 신라나 백제의 것과 아울러 우리 민족의 웅대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중에서 신앙 (신앙) 또는 사상의 문제로서 오늘 우리에게 깊은 주의를 끄는 것은 처음 불교를 받아들인 상황이다.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소수림왕·서기371∼384) 때라고 했는데, 그 때 어떤 경위를 거처서 불교의 신앙과 사상을 고구려 자신이 가졌던 국신과 어떻게 절충하고 조화해 받아들였던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아직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생각컨대 그 당시 고구려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던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아직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생각컨대 그 당시 고구려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것이냐는데 확실히 큰 국론을 불러 일으켯을 것이요. 틀림없이 그후 신라에서 이차돈이 순교한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부처님을 어느 만큼 높이 대접할 것이냐 하는 점에 많은 논란이 있었을 것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 없는 일은 지금도 우리 나라의 절이라는 절에는 어느 곳에나 부처님을 모신 법당보다 조금 높은 자리에 산신각 또는 독성당이란 것을 두고 있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백발의 노인 어른 한 분의 태영을 모시고 그 곁에 호랑이가 쭈그려 앉아 시중드는 시늉을 하고 잇다. 어떤 곳에는 호랑이와 어린아이가 있는 예도 있다. 이 산신님이 누구냐고 할 때 삼국유사에 보면 단군은 1천9백8세까지 살다가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셨다고 했다. 우리 나라 전에 산신각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에서 산신·지신을 모시는 일은 극히 오랜 풍속이다. 일반 가정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갔을 때도 먼저 산신님께 공양을 함도 그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산신은 우리 민족의 국신이다. 고구려에서도 부처님보다 윗자리에 국신을 모실 것을 엄숙한 율법으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싶으며 신라·백제의 삼국이 다 민족자신의 독립된 의지를 우위에 두었다는 분명한 표정으로 해석된다. 바꿔 말하면 민족 고유의 신앙체제를 훼손시킴이 없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융합해 자기 의지를 뚜렷이 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 사상의 괄목할 사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정기의 독자성은 이런 것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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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종족이 민족이라는 한 큰 덩어리의 공동체를 이룩하기까지의 그 일체감이나 동질성의 기반을 대개 혈연과 지연에서 찾는다. 이점은 오늘에도 우리가 특히 단일 민족인 우리의 처지에서 동포·동족을 찾는 것이나, 국토의 보존을 아끼는 점에서 먼 옛날의 연유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극히 먼 옛날로부터 전근대적인 씨족 부족 공동체로 내려오는 동안 공동생활의 최고의 수단이요 방편이었을 우리의 말, 즉 우리들의 언어 생활과 이에 따르는 일반 습속이나 문학적 기반의 동질성이 그 공동체에 일체감을 갖게 하는 극히 중요한 요소가 되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습속에는 건국신화에 근거를 둔 시조 숭앙을 통해 전통적이고 원시적인 신앙형태의 동질성이 공동체 안의 보편적인 민족감정, 또는 민족의 성격, 민족 정신으로 가다듬어졌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인간 개인의 성품과 슬기가 존중되며 화합·단결과 질서 유지를 위한 공동체의 기강으로써 최고선을 추구하는 정신 생활의 표준이 설 것이고, 그러한 사상의 태동은 그들의 시조 숭배의 신앙 형태와 융합되어 공동체 발전을 위한 커다란 정신적 추진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정신이 곧 그때 그들의 인간적 순결함과 아울러 민족이라는 무궁한 생명체의 핵심으로서 「정기」가 존중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대에도 생존을 위한 생산의 기반과 그 수단이 어떤 것이었더냐 하는 것은 그때마다 공동체 발전의 중요한 기본 요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부족의 집단 이동이 오래 전부터 그들의 생활지역과 기후 풍토의 조건에 따라 서서히, 그러나 줄기차게 북에서 남쪽으로 계속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민족의 자유, 민족의 의지를 외치며 민족 정신과 민족감을 말하며 은근히 민족의 자존심, 민족의 자부심을 우리의 큰 신념으로 사고 있는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묻지 않아도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이대로 살고있지 않느냐는 말로써도 충분히 대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영원한 한 생명체로서 우리 민족의 장래를 축복코자 할 때 우리는 우리들의 조상이 남겨준 생명의 산업적-문학의 많은 창조적 업적과 오늘까지 지녀오는 상당히 유능한 개인적 재질과 능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우리는 오랜 역사를 두고 외세의 침략을 허다하게 받아 왔고 안으로도 형제의 파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역사는 처참하고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의 종족은 한반도의 국토와 더불어 유지됐을 뿐 아니라 정신계발의 문학적 작업이 어느 한 때나 쉼이 없이 지속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한층 민족 유산으로 자랑스러운 것은 우리의 말과 글일 것이다. 만주와 중국 대륙에는 여러 종족의 흥망이 수 천년 계속된 것을 본다. 중국 본토에는 종족이나 민족의 갈래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얽혀 내려왔다. 만주와 몽고에서 나라를 세워 중국의 본토 대륙을 지배했던 원나라와 청나라의 이름은 있으나 그 종족과 그 말과 그 글은 이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취를 감춰 겨우 학자의 연구자료로 남았을 정도이다.

<민족 문화 유산의 자기 소화>
우리 민족이 본디 어디서 왔겠는냐는 것을 찾는 일은 『우리말이 어떤 것이냐』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 된다. 그만큼 말은 민족의 생활 내용이 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으며 말의 발달에는 민족의 정서와 사장, 철학과 논리-그 모든 발전의 자취가 담겨있는 까닭이다.
또 다른 우리의 우수한 일면은 중국 대륙으로부터 새로운 문학과 기술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그 때마다 잘 소화해서 우리의 창조적 능력을 빛내 온 점이다. 여러 분야의 예술이며 공예·종교 그 밖의 학문의 연구 계발의 업적을 많이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와 문학 유산의 배경을 생각할수록 우리는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앞으로도 인류사회에 우리만이 우리의 것으로 공헌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지녀온 민족 문화유산과 민족정신의 자기 소화, 그리고 자신을 재발견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청되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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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오늘 이 때에 민족 정신의 기반은 어디서 찾으며 근대적 민족 국가로서 공동체의 협동정신을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 근대사회 구조의 혁명적 변혁은 근대 과학의 발달에 의한 생산 기술과 산업 구조의 변혁에 그 바탕을 두고있다.
이 산업 혁명으로 말미암아 일반 사회의 구조에는 근본적 변혁이 일어났고 모든 사람은 국가의 성원인 한 국민으로서 제각기 자유와 독립을 누려야 할 개인의 발견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자유와 독립은 온 국민이 다같이 누려야할 것이기 때문에 온 국민은 동시에 평등권을 누려야할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한 근대사회의 민주사상과 궤도를 실천해 온지 벌써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유럽」이나 미국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사상은 이미 상식화한 것이다.
국가나 한 마을, 한 공동체에 대하여 독립된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함은 물론 공동체로부터 받아야하는 혜택도 당연히 평등의 원칙아래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공동체 정신의 기반은 그들 국민의 독립된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두고 있으며 공동체의 협동 체제는 그 국민, 그 시민의 책임에 의한 자치정신에 구심점을 두고 있다.
이리한 외국의 예로 보아 우리 나라의 근대화 작업이나 공동체 정신의 계발이 대개 어떤 것이어야 하겠느냐를 능히 헤아릴 수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하나씩, 둘씩 남에게서 배우는 것도 필요하고 소중한 일이겠지만, 그보다도 위로부터 또는 아래로부터 우리들이 스스로 커다란 깨우침을 가져야 할 일이 시급하다.
민족의 역사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지각을 가질 만큼 정신과 물질의 유산을 안겨 주었다.
이제 우리는 독립된 개인, 책임 있는 개인의 재발견과 새 시대를 개척해 나가야 할 민족의 재발견이 간절하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나라, 이 민족은 누구의 책임에서 어떤 길을 걸어 나가야 할 것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새로이 큰 깨우침을 가져야 하겠다는 다짐이다.
민족 정기를 말하고자 했던 이 글의 결론으로서 「소크라테스」가 일생의 교훈으로 삼았던 『너 자신을 알라』는 한 마디를 여기에 적어둔다.
이 말인즉 적어도 인간의 존엄, 인간의 정기를 찾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나 저마다 제 분수대로 반성과 자기 편달의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홍종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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